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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12>애틀랜타한국학교 초대 교장 송종규 박사

기억은 퇴색한다. 기록이 없으면 신화나 설화로는 남을지언정 역사는 되지 못한다. 애틀랜타 한인 사회도 50년이 넘었다. 하지만 이민 1세대들이 점점 나이가 들고 세대교체가 빨라지면서 초기 한인사회 기억들은 빠르게 잊혀져가고 있다. 한인 원로들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들어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이유다. 태동기 애틀랜타 한인사회의 다양한 모습, 그것이 곧 오늘의 우리를 있게 만든 뿌리기 때문이다. 한국학교는 한국 밖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한글과 더불어 한국의 역사, 전통 문화 등을 가르치는 곳이다. 이를 통해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민족의 얼도 이어간다. 조지아를 비롯한 동남부 지역에도 여러 한국학교가 있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곳이 애틀랜타한국학교(교장 김현경, 이사장 이국자)다. 지난 5월 8일 둘루스 주님의영광교회에서 애틀랜타한국학교 개교 40주년 기념식이 거행됐다. 이날 기념식은 졸업식도 겸했다. 장기근속 교사들이 표창장을 받았고 11명의 학생이 졸업장을 받았다. 또 송종규 초대 한국학교 교장, 박선근 한국학교 개교 당시 한인회장 등이 이날 행사에 참석, 개교 40주년을 축하했다. 한글날 575돌을 앞두고 애틀랜타한국학교 초대 교장겸 이사장을 만나 개교 전후의 이야기를 들었다. - 1981년이었죠. 애틀랜타 한국학교 초대 교장이자 이사장으로 활동하셨습니다. 두 직함을 모두 맡게 된 사연이 있을 듯 싶은데요. “원래 애틀랜타 한국학교 이전에도 한국학교는 있었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자 한국학교 부활에 대한 한인사회의 요구가 커졌고 마침 한국 정부에서도 새로 한국학교를 지원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당시 한인회장이던 박선근 회장(현 한미우호협회 회장)이 남다른 추진력을 발휘해 한국학교 설립을 주도해 나갔다. 준비위원회도 구성되었고 후원 모임도 잇따랐다. 1 981년 봄인가 싶은데 한국학교 개교를 위한 후원 모임이 있으니 오라고 해서 나갔더니 200여 명이나 모여 있었다. 모두 한인사회에서 쟁쟁한 분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가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그냥 참석이나 하자고 해서 갔는데 얼떨결에 그렇게 된 것이다(웃음). 또 한국학교 초대 교장으로 덕망 있는 분을 모시려 했지만 후보로 거론된 분들이 한사코 사양하는 바람에 그 자리도 어쩔 수 없이 내가 맡게 됐다. 그때는 나도 의사로 한창 왕성하게 일할 때였지만 한인사회의 미래를 담당할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그래서 어떤 일을 하셨나요. “처음 시작이니까 아무래도 기초를 세우는 일이었다. 수업 장소를 끊임없이 찾아야 했고 정관을 만들어 주 정부와 IRS 등에 비영리단체 등록도 해야 했다. 초창기라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커리큘럼을 만드는 일도 중요했다. 이런 일들을 위해 학교 안팎의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고 선생님들도 참 많은 수고를 했다.” 송종규 박사의 회고는 2002년 출간된 ‘애틀랜타 한인 이민사’에 실린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 책에 따르면 애틀랜타 한국학교는 1981년 7월 메모리얼 아트센터 옆에 있는 미국 제일장로교회(First Presbyterian Church) 교육관에서 처음 개교했다. 그 전에 당시 박선근 한인회장이 한국학교 창설 준비위원회(위원장 방창모)를 구성하고, 동 위원회에서 위촉한 이사회 초대 이사장 겸 교장으로 송종규씨를 선출함하는 등 사전 작업이 진행됐었다. 당시 신문 기록에 따르면 개교 첫해 한국학교 등록 학생은 미국인 학생 3명을 포함해 모두 115명이었다. 개교 당시 교사는 김경숙(국어), 강은희(음악), 안재복(미술), 나오희(음악), 지혜정(국어) 등이었다. 송종규 박사 부부. 부인 박영혜씨도 이대 의대를 졸업한 정신과 의사다. - 개교를 전후해 가장 힘들었던 점은 뭐였나요? “수업 할 장소를 구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 미국 교회를 중심으로 여러 곳을 찾아 다녔지만 수없이 퇴짜를 맞았다. 당시 김경숙 선생과 함께 디케이터에 있는 어떤 미국 교회를 찾아갔을 때가 기억이 난다. 청소비, 수도비, 전기비 등 유틸리티 비용은 대겠다고 했지만 렌트비부터 갖고 오라면서 거절했다. 그 때 터덜터덜 걸어 나와 잔디밭에 앉아 한숨을 쉬어가며 샌드위치를 먹었는데, 얼마나 낙담이 되던지. 그렇게 열 곳도 더 되는 곳을 찾아다닌 끝에 마침내 하이뮤지엄 옆에 있는 미국 제일장로교회에서 허락을 해 주어 역사적인 개교를 할 수 있었다.” -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군요. 그 이후엔 장소 문제는 없었나요? “그렇게 어렵게 구한 교회에서도 바로 쫓겨났다. 아이들이 콜라를 쏟는 등 교회를 너무 어지럽힌다는 게 이유였다. 집 없는 설움을 절감하며 다시 수업 장소를 찾아다니는 게 일이 됐다. 다행이 1982년 1월 다운타운에 있는 애틀랜타 태버너클 침례교회(Atlanta, Baptist Tabernacle)에 새로 둥지를 틀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당시 장소 물색의 어려움은 한인 이민사 책에도 잘 나와 있다. 송종규 초대 교장에 이어 2대 김태형 교장, 3대 방창모 교장도 태버너클 침례교회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고마운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이 교회 샤럿(Mr. Sarratt) 목사는 렌트비도 안 받고 교육관까지 쓸 수 있도록 적극 후원을 해 주었다는 것이다. 김태형 2대 교장은 “아이들이 책상을 부수는 등 난리가 나서 샤럿 목사님을 찾아가 미안하다고 했더니 세상 모든 것과 교회안 모든 물건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 교회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해서 큰 감동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태버너클 침례교회로 옮긴 애틀랜타한국학교는 10년 가까이 그곳에서 수업을 하다가 1992년 8월에 한인천주교회 교육관으로 이전했다. 이후 노크로스고등학교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애틀랜타한국학교 외에도 교회나 성당 등에서 운영하는 다른 한글학교도 잇따라 생겨났다. 한인 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애틀랜타한국학교 만으로는 증가하는 학생들을 수용하는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수업도 한글 교습 외에 한국 역사, 태권도, 북, 민요, 서예, 역사, 동요, K-팝 등의 다양해지고 있다. 한편 애틀랜타한국학교는 지난해 2020년 9월 둘루스에 2452스퀘어피트 크기의 사무실을 구입,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초창기 한국학교 분위기는 어땠나요? “학생도 선생님도 다들 열정이 넘쳤다. 1981년 첫 수업을 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있었다. 학부모님들 역시 멀리 앨라배마에서도 오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도 몇 시간씩 운전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우리말과 우리 글, 우리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눈물겨웠다. 고국 떠나온 이민자로서 오히려 나라 사랑, 모국 사랑의 마음이 더 컸던 게 아니었나 싶다.” - 한국학교를 운영하자면 돈도 많이 필요했을 텐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송종규 이사장 명의의 후원 감사광고가 눈길을 끈다. “수업료는 받았지만 그것만으로는 힘들었다. 이사회를 중심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고 각계에서 여러 분들이 성금도 보내주셨다. 미국인 중에도 한국전 참전용사 등 성금을 보내주는 분들이 있었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 하는데 아마 1982년 쯤인가 한국학교 기금마련을 위한 가수 이미자 초청 공연도 했었다. 다운타운 시빅센터에서 공연을 했는데 많은 한인들이 성원했고 공연장도 거의 다 찼던 것 같다.” - 그렇게 세운 한국학교가 벌서 40년을 맞았습니다. 초대 교장으로 또 이사장으로서 감회가 남다를 텐데요. “40주년 기념식에 함께했다는 게 영광이다. 개교 초기 함께 수고했던 분들이 이젠 다들 연로해졌고 돌아가신 분들도 많은데 그래도 우리가 시작한 한국학교가 40년이나 이어져온 것을 보면 모두 흐뭇해하고 대견해 하실 것이다. 10년 뒤 50주년 행사는 더 발전된 모습으로 더 멋지게 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개인 이야기도 좀 들어보겠습니다. 1970년부터 애틀랜타에 정착하셨는데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애틀랜타 오기 전까지는 나는 조지아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다. 뉴욕에서 수련의로 일하면서 뉴올리언스로 출장을 가는데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숲이 많고 아주 좋아 보여 곁에 있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저기가 바로 조지아, 애틀랜타라고 했다. 그때 속으로 아, 저기 가서 살면 좋겠구나 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 당시엔 여전히 흑백 분리 화장실이 있었고 식당도 백인과 유색 인종이 따로 들어가는 곳들이 많았다. 지금은 정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다. 70년 초에는 한인사회라고 하기에는 한인들도 거의 없었다. 70년대 말부터 조금씩 한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모임도 생겨나고 한국학교의 필요성도 더 커졌던 것 같다.” - 산부인과 의사로 평생 일하셨는데 미국에서 외국인 의사로서 힘든 점은 없었나요? “1967년 뉴욕으로 왔을 때부터 정신없이 일했다. 1970년 애틀랜타에 온 후에도 전문적인 일을 해서 그런지 특별히 차별받거나 어려움은 없었다. 그때는 월남전이 한창이었고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백인, 흑인 할 것 없이 여러 인종의 수많은 아이들을 받았고 그만큼 사연도 많았다. 기회가 되면 그 이야기도 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 은퇴 후엔 어떻게 지내시나요? “평생 일만 하느라 인문학 책을 많이 못 읽었다. 뒤늦게 책 읽는 재미에 빠져 있다. 옛 친구들이 함께 하는 독서모임도 열심히 참석하고 있다. 딸이 가까이 살아서 손주 봐 주는 것도 요즘 우리 부부에겐 중요한 일이다.” - 끝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은? “내가 이제 80이 넘었다. 지내 놓고 보니 인생은 지뢰밭 사이를 헤쳐 오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여러 번 죽을 고비도 넘겼고 힘든 시기도 있었다. 그렇지만 항상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또 오늘 좋다고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늘 겸손하게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학교도 교사와 장소 확보, 자금 문제, 교과 과정 수립 등 지난 40년 동안 문제는 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도 그렇게 잘 성장해가기를 바란다.” 전 세계에 한국학교는 1300여 개나 된다고 한다. 그 중 40년 역사를 가진 곳은 흔하지 않다. 그만큼 애틀랜타한국학교가 오랜 시간 민족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심는 데 큰 역할 해왔다는 말이다. 애틀랜타한국학교만이 아니라 한인사회의 모든 한국학교가 꿋꿋이 그런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송 박사를 비롯한 모든 한인 1세대들의 공통된 염원일 것이다. ▶송종규 박사는 1940년생. 산부인과 전문의로 평생 일했다. 1964년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군대 3년을 마친 뒤 1967년 미국에 왔다. 뉴욕에서 수련의를 마친 뒤 1970년부터 애틀랜타 정착했다. 정신과 전문의로 일하다 최근 은퇴한 부인 송(박) 영혜씨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큰 아들과 딸은 의사, 작은 아들은 실리콘밸리에서 일한다. 글·사진=이종호 대표

2021-10-08

[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11>미 동남부 베트남 참전 유공자회 조영준 회장

# 첫인상이 밝았다. 아니 맑았다. 미국 동남부 베트남참전 국가 유공자회 조영준 회장. 일흔 다섯 나이에도 그런 얼굴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지난주 조 회장을 만나 참전전우회 이야기를 비롯해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들었다. 월남전 참전 경험은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이었다. 미국 대기업에서 36년을 일한 경험도 특별했다. 미주 한인 이민사의 한 부분을 남긴다는 마음으로 조 회장과의 만남을 거칠게나마 정리해 본다. - 베트남엔 언제 어떻게 가셨습니까? “1969년 3월에 가서 20개월 있었습니다. 백마부대 일등병이었죠. 잠자리비행기라 불렀던 헬기의 기관총 사수를 했습니다.” 월남전을 다룬 영화 ‘플래툰’이나 ‘포레스터 검프’ 같은데 나오는 바로 그 치누크 헬리콥터를 탔다는 얘기였다. 당시 헬기를 포함한 일체의 항공 작전은 모두 미군 주도 하에 이뤄졌다며 한국 군인인 자신이 헬기를 타고 임무를 수행한 것은 나름 대단한 일이었다고 조 회장은 회고했다. -조지아에도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이 많을 텐데 한인은 얼마나 되나요? “드러나지 않는 분들도 많아 정확한 숫자는 파악이 안 됩니다. 우리 동남부 유공자회에는 130명 정도 활동하고 있어요. 미국 전체로는 3000명 쯤 된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에 걸쳐 총 32만 여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평균 주둔군은 5만명 정도. 그들을 통해 한국은 외화 획득과 경제 개발이라는 소위 월남전 특수를 누렸다. 대가도 컸다. 5099명이 전사했고 1만1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훗날 고엽제 피해자로 신고한 사람도 16만 명에 이른다. 조 회장은 나라의 부름에 목숨 걸었던 사람들을 국가가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공자회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지금 준비하고 있는 행사는 어떤 겁니까? “2018년에 조지아 주지사가 매년 3월 23일을 ‘한국군 월남전 참전 전우의 날’을 선포했습니다. 미국 50개주 중 메릴랜드주에 이어 두 번째였습니다. 이듬해 기념식을 했는데 작년엔 코로나로 못했습니다. 올해도 미뤄 오다가 오는 9월11일에 3주년 기념식을 하게 됐습니다.” 행사는 이날 오후 5시 노크로스에 있는 애틀랜타한인회관에서 열린다. 예상 참석자는 250명 정도. 조지아주 보훈처장, 귀넷카운티 관계자 등 정치인과 정부 쪽 인사들, 애틀랜타 총영사 등을 초청했다. 한인뿐 아니라 귀넷카운티 내 미국인 참전용사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 기념일 제정 외에 다른 성과도 있었나요? “작년에 운전면허증과 자동차 번호판에 베트남전 참전용사(Veteran)라는 표시를 해 주는 법이 통과되었습니다. 브라이언 켐프 조지아 주지사가 최종 서명도 했고요. 이건 50개주 가운데 처음이었는데 이로써 한인 참전 용사들도 미국 참전 용사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됐습니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이 일을 성사시키기 한인사회 많은 인사들이 힘을 모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중심엔 월남전 참전 유공자회가 있었다. - 베테랑 면허증이나 자동차 번호판이 나오면 달라지는 게 있나요? “명예죠.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걸 국가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이기도 하고요. 여담이지만 이런 ‘쯩’이 있으면 이런저런 혜택도 있긴 합니다. 일부 매장에선 할인도 받을 수 있고요. 미국 사회가 참전용사들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예우해 주고 관대하게 대해준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습니다.” # - 화제를 바꿔보겠습니다. 미국에 오신지 46년째라 하셨는데 그동안 어떤 일을 하셨나요? “가전회사 GE(General Electric)에서 일했습니다. 시카고 공장에서 36년을 근무했어요. 지금이야 한국의 삼성이나 LG가 더 유명하지만 한때는 세탁기, 냉장고 등으로 세계를 호령했던 회사였습니다. 거기서 냉장고도 만들고 세탁기도 만들었습니다.” - 그 큰 회사에서 36년이면 대단했군요. 어떻게 그렇게 오래 일할 수 있었나요? “이민자로서 미국 굴지의 회사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일했지요. 제가 입사할 때만 해도 생산 라인에 1000명이 넘게 있었지만 퇴직 무렵엔 자동화 영향으로 불과 90명이 똑같은 일을 했어요. 2~3년마다 바뀌는 매니저들이 계속 직원을 줄여나갔지만 저는 ‘안 잘리고’ 끝까지 있었습니다. 영어도 짧고 컴퓨터도 잘 몰랐지만 성실성 하나는 인정받았었나 봅니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그만큼 맨주먹으로 시작해 성공 신화를 일궜다는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실패엔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지만 성공의 이유는 거의가 비슷하다. 분야만 다를 뿐 남다른 노력과 근면 성실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지켰다는 것이 그것이다. 조 회장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 이민 오시기 전 한국에선 무슨 일을 했나요? “(조금 망설이다가) 사실은 영화판에 있었습니다. 군대 가기 전에는 명보극장에서도 일했고요. 결국 배우가 되어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크게 유명해지진 못했지만 이런저런 조역은 많이 맡았었죠.” -어쩐지 민간인(?) 답지 않은 얼굴과 목소리를 가졌다 싶었는데 역시 그랬었군요. 기억나는 작품은 있나요? “김추련 주연의 ‘빵간에 산다(1973)’, 강범구 감독의 ‘일대영웅(1973)’이 떠오르네요. 신상옥 감독, 배우 김희라씨 영화에도 출연했고요, 주로 깡패들에게 얻어 맞는 조역이었지요. 가수 남진 씨와도 영화를 찍었는데 그때 유일하게 때리는 역할을 해 봤습니다. 하하” 영화 이야기가 나오자 조 회장의 표정이 밝아지고 목소리도 더 커졌다. 갑자기 전화기를 꺼내더니 옛날 사진도 보여주었다. 유명 배우들과 함께 찍은 것도 있고 출연했던 영화 포스터도 있었다. 젊은 시절 추억이 많을수록 노년이 더 풍성하다는 말이 있다. 옛 사진을 보며 즐거워하는 조 회장을 보면서 왜 다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이것저것 많은 것을 시도해 보라는지 알 것 같았다. - 북한에도 다녀오셨다면서요? “1989년이었습니다. 갑자기 북한 다큐를 찍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달 휴가를 내고 무작정 들어갔죠. 제가 미국 시민권자니까 가능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젊었고, 과거 배우도 했지만 별로 주목을 못 받았는데 북한 다큐 하나 제대로 찍는다면 요즘 말로 한 번 뜰 수 있겠구나 하는 욕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어려움은 없었나요? “평양에 내리자마자 북한 요원 3명이 따라붙었지만 그들과 먹고 마시며 금세 친해졌습니다. 덕분에 별다른 제재는 받지 않았어요. 평양을 비롯해 휴전선까지 5박 6일 동안 두루 다니며 이것저것 잘 찍었습니다. 출국할 때도 찍은 필름을 무난히 가져 나올 수 있었고요.” -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북한 땅에서 휴전선까지 내려가 봤는데 철책선 너머 남쪽으로 제가 근무했던 곳이 떠억 보이는 거예요. 거기 휘날리는 태극기를 봤는데 정말 울컥하더라고요. 이런 게 바로 애국심이구나 싶었습니다. 이후 미국에 돌아 온 뒤 북한서 찍은 영상을 한국 정부 관계자에게 그대로 전달했습니다.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요. 그때만 해도 북한 정보가 갈급할 때였기 때문에 이럴 때 애국 한 번 하자는 마음이었습니다.” # 길어지는 얘기를 이쯤에서 접고 현재를 돌아보았다. 마침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로 과거 월남전까지 다시 소환되고 있다. 베트남에서도 그랬듯이 아프간 역시 명분과 실리에서 별로 얻은 것이 없었다는 비슷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전쟁터에서 목숨 걸고 청춘의 한 시기를 보냈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아무리 좋은 전쟁도 어떤 나쁜 평화보다는 못하다고 했다. 그렇다 해도 참전 용사들의 젊은 날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폄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라가 불러서 응답했고, 그 부름에 목숨을 걸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고 가치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 70년대 초 이역만리 남국의 밀림을 누볐던 월남전 참전용사들, 그들은 이제 대부분 70을 넘기고 80이 되고 있다. 그들의 피와 땀을 기억하고 예우하는 것은 그들을 불러낸 국가의 당연한 의무다. 동시에 지금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도리이기도 하다. ▶조영준 회장은… 1947년생. 1969년 3월부터 20개월간 백마부대 소속 일등병으로 베트남에 파병됐다. 제대 후 몇몇 영화에도 출연했다. 1975년 도미 후 시카고 GE에서 36년간 일했고 은퇴 후 2013년 애틀랜타에 정착했다. 2019년부터 동남부 베트남전 참전 국가유공자회 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이종호 대표

2021-08-20

[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10> ‘미-한 [변형]사전’ 펴낸 의사 이원택 선생

노인정신과 전문의로 환갑 지나 ‘늦깎이 문학 인생’ 표제어 3만 여개…단어마다 ‘수우미양가’ 등급 매겨 단순 뜻풀이 넘어 백과사전 잡학 정보로 읽는 재미 #. 안 그러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선입견을 가질 때가 있다. 직업 따라 교수는 어떻고, 사업가는 어떻고, 종교인은 또 어떨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이 그것이다. 하지만 직접 이야기를 나눠보고 만남이 이어지면 그런 생각이 정말 편견에 불과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원택 선생도 그렇다. 볼 때마다 선생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되면서 그 깊이의 끝이 어디인지를 가늠키 어려운 분이구나 생각하곤 한다. 올해 만 74세. 남가주 롱비치에서 노인정신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 의사다. LA 한인사회에선 꽤 유명한 문인이기도 하다. 그런 선생이 지난 4월 애틀랜타에 왔다며 불쑥 전화를 걸어왔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발이 묶여 있었는데 바람도 쏘일 겸 자동차 빌려 대서양 연안을 훑어 내리던 중 이곳까지 오게 됐다는 것이다. 선생을 안 지는 10년이 넘었다. 그의 글과 책을 즐겨 읽었고, 가끔 만나 문학과 세상을 얘기하며 유쾌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나는 선생의 박학다식과 유머가 좋았다. 그 나이, 그 직업 사람들이 가질 법한 권위 의식이나 허위, 가식이 전혀 없다는 것도 15년의 나이 차를 뛰어 넘어 허물없이 어울릴 수 있는 이유였다. 연락을 받고 바로 스와니에 있는 선생의 고교 동창 친구분 집으로 달려가 선생을 만났다. 옛 벗을 맞은 친구의 대접이 곁에서 보기에도 극진했다. 나도 모처럼 어울려 문학과 역사, 자연과 인간을 이야기하며 밤늦도록 얘기꽃을 피웠다. 그날 선생이 방금 나온 것이라며 놀라운 책을 한 권 건넸다. 1236쪽. 한손에 들기도 버거운 묵직한 영어 사전이었다. 편저자는 바로 이원택 선생 자신이었다. 워낙 대단했던 선생의 집필력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책을 받아들고는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졌다. 6년이나 걸려 썼다는 책의 제목은 ‘이원택의 미-한 [변형] 사전’(지식과 감성#, 2021년 4월 19일 초판 1쇄 발행)이다. 속어, 신조어를 포함해 표제어만 3만2000여개. 그 중 2만 여개는 기존 영한사전에서 골랐고 나머지 1만 개는 미국 신문, 잡지, 교과서, 상품, 광고 등에서 찾아 채웠다고 했다. 겉표지에 새겨진 ‘뭐, 이런 사전이 다 있어?’라는 문구가 이 사전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질문을 안 던질 수 없었다. 그날 묻고 들은 이야기와 그 이후 원격으로 주고받은 선생과의 대화를 문답식으로 재구성했다. #. -어떻게 이런 사전을 만들 생각을 했나. “취미로 문학을 하다 보니 영·한 사전을 많이 찾아보게 되었다. 마음에 안 들었다. 기존 사전들이 단어 원래의 맛이나 느낌을 살리지 못한 번역으로 ‘죽은 사전’사전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이참에 새로 한 번 써보자 싶었다. 46년간 이민 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미국 사는 또는 미국으로 이민 올 한국인들을 위해 제대로 된 ‘미국어’ 사전을 만들어 보자는 게 시작이었다.” - 영어 좀 한다는 분들은 번역서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많이들 하는 것 같다. 집필에 앞서 좀 더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을 텐데. “처음엔 소설 사전을 써 보려했지만 실패했다. 대신 21세기 미국인들이 생활 현장에서 쓰는 단어들의 어원을 추적하고 파생어별로 정렬해서 소설식으로 풀이해 이 사전을 만들었다. 70여년을 살면서 섭렵했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뜻풀이도 새로 했다. 보통 한국인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한글 발음, 한글 해석, 대체 한글, 한국어 처방도 표기했다. 영어에 밀려나고 있는 한국어를 살려냈으면 하는 것이 내심 목표였다.” - 뜻이 고상하다. 기존 사전과는 어떤 점이 다른가? “기존 사전의 틀에서 잡소리는 싹 다 뺐다. 표제어가 많거나 설명이 길다고 다 좋은 사전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사전들은 99% 모방에 1% 창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전은 95% 모방에 창작이 5% 쯤은 된다고 자부한다. 또 하나 다른 점은 수록된 각 단어마다 수우미양가 등급을 매긴 것이다. 한국말로 쓸 수 있는데도 굳이 영어로 표현하는 폐단을 막아보자는 충정에서였다.” - 수우미양가 등급이라니, 무슨 말인가? “영어는 외국어다. 가능한 한 우리말이 있으면 우리말로 쓰는 게 맞다. 그런 취지에서 수록 단어마다 한국말로 대체 가능한 정도 따라 구분해 등급을 매긴 것이다. ‘수’는 한국어로 도저히 대체할 수 없는 단어, ‘우’는 한국어 번역은 됐지만 뭔가 부자연스러운 단어, ‘미’는 써도 좋고 안 써도 좋은 말이지만 이미 한국어로 자리 잡았거나 국제 감각을 살릴 수 있는 단어다. ‘양’은 좋은 한국어가 있음에도 과시용으로 흔히 쓰는 단어에 붙였고, ‘가’는 한국어를 파괴할 수 있는 말로 가능한 한 쓰지 말아야 할 단어다.등급을 정하는 게 정말 머리가 아팠다. 그 때문에 머리털이 다 빠진 것 같다.” - 대단한 열정이다. 그런데 정말 궁금하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클릭 한 두 번이면 온갖 영어 사전이 다 뜨는데 누가 이런 걸 본다고 6년씩이나 시간 들이고 돈까지 들여 이런 사전 펴낼 생각을 했나? “100년 전에 쓰인 독립선언문 중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말이 반도 안 된다. 요즘 한국 대중 매체에 나오는 말도 열에 한 두 마디는 다 영어다. 특히 연예, 스포츠, 광고, 상호, 상품명은 영어가 40~50%에 이른다. 이러다간 100년 후엔 아예 한국말은 사라지고 영문에 토씨나 어찌씨만 딸린 영문 이두문자가 판을 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비극을 막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다.” - 엄청난 분량의 원고였을 텐데 출판사 구하기가 쉽지 않았겠다. “정말 그랬다. 시장성을 먼저 따져야 하는 출판사 입장에서 이런 사전을 만들겠다고 나서 줄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좋은 출판사를 만나 작업을 마쳤다. 고마울 따름이다. 이왕 책이 나왔으니 한국의 영문과 대학생이나 중고교 영어 선생님들이 많이 봐 주면 좋겠다. 매일 영어를 접하며 사는 미주 한인들도 본다면 백과사전 읽듯이 재미가 있을 거다.” - 책이 나온 지 석 달 쯤 됐다. 찾는 사람은 좀 있는지? “초판 4000부를 찍었는데 요즘 종이 사전을 사 보는 사람이 없어 솔직히 걱정을 많이 했다. 한국의 산간벽지에 근무하는 영어 선생님들에게 기증이라도 할까 하고 알아봤는데 받아주겠다는 데가 없어 그것도 쉽지 않았다. 까딱하다간 비싼 책 수천 권이 폐기 위기에 처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네스코에도 문의했다. 무슨 구호품이나 되는 줄 알고 북한에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 광고 시장도 알아봤는데 배보다 배꼽이 커서 그것도 고민이다. 그나마 최근 한국의 한 신문에 소개가 되었는데 그 덕분인지 현재 교보문고 외국어 서적 부문 판매 순위에서 꽤 상위에 올라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 의사 일도 바쁠 텐데 어떻게 집필 시간을 냈나? “어릴 적 꿈이 소설가였다. 하지만 가난에 시달리며 자라다 보니 돈도 중요했다. 그래서 의사가 됐다. 100세 시대가 온다는 걸 진작 예측하고 노인정신과로 방향을 잡았지만 노인들은 병원에 몇 번 오다가 곧 사라진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30년 의사 일을 하면서 좀 먹고는 살 만해졌다. 환갑 지나고부터는 그동안 못했던 작가의 길을 다시 가보자 마음을 먹었다. 글 쓰는 게 즐겁다. 좋아하는 일인데 왜 시간을 못내겠나.” 선생은 말 그대로 늦깎이 문학의 길을 걷고 있다. 2010년 ‘문학예술’에서 수필로, 2년 뒤 ‘한국문인’에서 시로, 또 3년 뒤인 2015년엔 ‘미래시학’에서 평론으로 내리 등단을 했다. 이후 ‘만화경’ ‘신비경’ 등 ‘경’자 돌림 작품집 6권을 잇따라 냈다. 자신만의 글쓰기 방법론을 설파한 ‘Meta writing’이라는 책도 있다. - 말씀을 들어보니 이번에 나온 사전은 우리말 지키기를 위한 노력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큰 것 같다. 개인 저서 차원을 넘어 이민자로서 한인 이민사회의 성과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게 봐 주니 감사하다. 하지만 막상 책이 나오고 보니 부족한 것도 있고 더 보태고 싶은 것이 또 생겼다. 곧 개정증보판을 펴낼까 한다. 이번에는 단어의 뿌리를 좀 더 연구해 ‘어원사전’이 되도록 해 볼 생각이다. 기대해 달라.” #. 선생에게서 책을 건네받은 게 4월. 벌써 석달이 지났지만 지금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잠자기 전 수시로 들춰보고 있다. 사전 읽기가 원래 그렇듯 지루한 듯 재미있고, 돌아서면 잊어버리지만 그래도 한 번 시작하면 잘 손을 떼지 못하는 매력이 있는데 이 사전이 정말 그렇다. 콩글리시 모음, 전산망 약자 등 알아두면 재미있는 것들로 채워진 부록 뒤적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무리 유튜브나 동영상이 대세인 시대라지만 유행을 거스르는 대작 종이 책 한 권쯤은 소장해 보는 것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 그런 일에 뜻을 세워 몇 년씩 열과 성을 쏟아 붓는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응원할 수 있는 길이라면 더욱 그렇다. 한인사회, 나아가 한국 문화 전체의 지평은 그렇게해서 넓어지는 게 아닐까. 책은 한국의 주요 서점에서 구할 수 있고 미주에선 LA 반디서점(213-389-8885)이나 웹사이트 Bandibookus.com에서 구할 수 있다. 35달러. 한국 정가는 35000원이다. 이원택 선생은… 1947년 경기도 파주 출생. 노인정신과 전문의. 경복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육군 대위 전역 후 1975년 미국에 왔다. 1980년 남가주 롱비치에서 개업,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시, 수필, 평론 부문에서 잇따라 등단,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2015년 한미번역문학가협회를 만들어 회장을 역임했고 2018년엔 시로 미주펜문학상을 받았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

2021-07-23

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9> 전욱휴 티칭프로

전욱휴(57) 프로는 남다른 실력과 노력으로 2000년대 한국에서 골프 교육의 새 장을 연 사람이다. 그의 막내 딸(전영인 프로)도 18세에 미국 LPGA 최연소 데뷔한 골프천재다. 자타 공인 한국의 최고 골프 교습가로 알려진 전욱휴 프로가 애틀랜타에 둥지를 틀었다. 지난 목요일 중앙일보 인근 베이커리 카페에서 그를 만나 함께 커피를 마셨다. 골프가 곧 인생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전한다. - 골프를 별로 잘 치지 못하는 저도 전욱휴라는 이름 석자는 기억합니다. 옛날이긴 하지만 한때 전욱휴 골프 레슨 비디오 테이프도 열심히 봤거든요. “아, 그랬나요? 감사합니다. 2001년부터 10년 정도 정말 바쁘게 활동했습니다. 방송 출연도 하고 신문 칼럼도 쓰고, 명사들 골프도 가르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죠. 2010년 이후에는 골프 치는 딸 아이 뒷바라지 하느라 대외 활동은 좀 줄었지만 그래도 펼쳐 놓은 사업들이 많아 늘 바쁘게 지냈습니다.” - 서울대에서 생물학을 공부한 걸로 들었는데 어떻게 골프로 진로를 바꾸게 됐나요? “1987년 대학 졸업하고 바로 미국으로 유학 왔습니다. 그 때 우연히 주말 골프를 했는데 재미도 있고 적성에도 맞았습니다. 바로 싱글 핸디를 쳤죠. 5언더파 67타까지 기록했었습니다. 그때부터 골프가 내 인생이로구나 생각하고 진로를 바꾼 거죠.” ‘어쩌다 인생’이란 말도 있듯이 삶이란 이렇게 뜻밖의 경로로 가는 길이 180도 달라지기도 한다. 공부보다 골프에 더 재미를 붙인 그는 1996년엔 미국 프로골프협회(PGA)에 입문했다. 2000년엔 그 어렵다는 정회원(클래스A 멤버)가 되었고 미국 프로 골프장 헤드 프로로도 일했다. 당시 한국에서도 한창 골프 붐이 일고 있을 때였다. 명문대 출신 유학생으로 영어 되고, 실력 있고, 잘 생기기까지 한 그를 방송가에서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그는 2001년 귀국했다. - 귀국 후 활약이 대단했죠. 저희 중앙일보에 실렸던 칼럼도 기억합니다. “예, 귀국하자마자 SBS 골프 해설을 했죠. ‘디지털레슨’이란 프로그램도 진행했고요. 이후 MBS 전속 골프 해설위원으로, 또 J골프 채널에도 꾸준히 출연했습니다. 중앙일보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 골프 칼럼도 몇 년을 연재했고요. 특히 칼럼 집필이 힘은 들었지만 그 때문에 더 공부해야 했고 두고두고 자산이 되었습니다.” - 방송 출연 횟수로만 치면 수천회가 넘었다지요. 특히 기억에 남는 게 있습니까? “세계 최정상 티칭 프로들과 함께 했던 ‘월드 그레이트 티처스’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아니카 소렌스탐 등 세계적인 선수는 물론 데이비드 리드베터, 봅 토스키, 데이브 펠츠 등 쟁쟁한티칭 프로들과 함께 진행했죠. 페블비치 등 세계 유수의 골프장에서 찍었는데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고 있지요.” - 유튜브에서 그 영상들을 볼 수 있겠군요. “아닙니다. 유명 골프 채널 프리미엄 코너를 통해서 볼 수가 있지요. 유튜브도 몇 번 했는데 저 하고는 안 맞는 것 같아 지금은 안 합니다. 솔직히 유튜브는 골프 실력 향상과는 별개입니다. 목 운동만 될 뿐이죠. 정말 실력을 늘리려면 제대로 교습 받고 연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전 프로는 2002년 경희대 체육대학원 ‘프로골퍼 최고전문위과정’ 겸임교수를 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또 주요 기업 임원이나 기관, 단체의 VIP들도 꾸준히 가르쳤다. 올해부터는 애틀랜타에서 골프교실을 준비하고 있다. 6월부터 시작할 전욱휴 ‘명품 레슨’의 구호는 ‘10타 줄이기 프로젝트.’ 이를 위해 전 대표는 둘루스 파라곤 골프센터와 제휴해 3층 시설을 완전히 바꾸는 등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 이곳 애틀랜타에는 어떻게 자리 잡게 되셨죠? “제 딸이 LPGA 프로입니다. 미국이 주 활동무대니까 자연히 미국 이곳 저곳을 다니게 된 거죠. 애틀랜타 오기 전에 텍사스, 플로리다 등에서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애틀랜타에 와 보니 너무 좋습니다. 한인사회도 따뜻하고, 한인 맛집도 많고, 무엇보다 기후가 환상적입니다. 가족들도 다 좋아하고요. ” 전욱휴 프로는 딸이 둘이다. 큰 딸은 대학을 마치고 현재 의대 진학을 준비 중이다. 둘째가 앞에서 말한 LPGA 전영인 프로다. 세 살 아래인 아내는 대학 때 가정교사 하면서 만난 제자(?)였다. 함께 유학와 공부를 마친 뒤 지금은 한국 모 대학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전 프로 역시 가족이 있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지만 작년 코로나 이후 계속 미국에 머물고 있다. - 딸 전영인 선수 자랑 좀 하시지요. “2000년생이니 올해 만 21살이 됩니다. 5살 때부터 제가 가르쳤습니다. 소질도 있고 재미도 있어 했죠. 10살 때 ‘US 키즈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했고요, 2012년 주니어월드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올랐습니다. 2014년부터 4년 연속 미국 주니어 국가대표로 활약하다가 2019년에 마침내 LPGA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당시 만18세로 최연소 데뷔기록이지요.” - 요즘은 조금 활동이 뜸한 것 같던데요? “코로나 때문에 작년에 쉬면서 한국에 가 있습니다. 그 사이 성인이 되면서 골프 외에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고 점검하는 시간도 갖고 있는 것 같고요. 사실 그동안은 오로지 아빠 하자는 대로 했고 아빠 권하는 길로만 따라 왔으니 홀로서기를 위한 성찰의 시간도 필요할 겁니다.” 전 프로는 부모로서 최선을 다해 밀어주고 성원하긴 했지만 혹시라도 부모 욕심 때문에 아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놓치지는 않았을까 때론 안스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딸이 골프를 통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라고, LPGA 선수로서 한때 반짝하는 스타가 아니라 박인비나 아니카 소렌스탐 같이 꾸준히 인정받는 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숨기지 않았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시기가 힘들진 않은가요? “지난 몇 달간 애틀랜타 골프스쿨 준비하느라 힘들 겨를도 없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또 저 자신을 위해 매일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에도 나가고 있고요.” 그는 뜻밖에도 신실한 신앙인이었다.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날마다 절대자 앞에 머리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서 확인한 몸에 밴 겸손과 친절도 그런 신앙인의 자세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동안 수많은 명사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실패와 좌절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죠. 하지만 그분들도 골프 앞에선 한결같이 좌절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돌아보고 세상을 달리 바라보기도 하죠. 그래서 골프가 매력이 있는 겁니다.” 그의 말대로 골프는 곧 인생이라고들 한다. 뭐 하나 자기 계획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도처에 수많은 변수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똑같다. 하지만 아무리 절망의 순간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다면 한 가닥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 역시 골프가 인생의 축소판인 이유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끝으로 물었다. - 한인들 대부분 골프를 좋아합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칠 수 있을까요? “골프는 단순한 운동이 아닙니다. 때론 과학 이상이지요. 거기다 정신적 영역이 더해진다는 점에서 잘 안되는 게 당연한 겁니다. 일단은 기본이 탄탄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스윙이나 기본이 안 된 것을 바로 인정해야 실력이 향상됩니다. 나이나 남녀에 따라 체형과 근력 등이 다르기 때문에 스윙 원칙도 각 개인에 따라 달라야 하고요. 그래서 레슨이 필요한 겁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꾸준한 연습이지요.” 한 마디 비법을 기대했지만 역시 원론적인 대답만 돌아왔다. 어쩌면 그게 당연하고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골프를 시작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다음 세 가지다. “힘 빼라, 머리 들지 말라, 공에서 눈 떼지 말라.” 20년 경력의 레슨 달인 전욱휴 프로가 툭 던진 말도 똑같았다. 애틀랜타에서 만난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따서 만들어 준 구호라며 일러준 말이다. “골프 잘치고 싶으신가요? ‘욱!’ 하지 말고 ‘휴~’ 하세요.” 글·사진=이종호 ◇전욱휴 프로는 1987년 서울대를 졸업했다. 미국 PGA 정회원. 2001년 이후 SBS, MBC, J-골프 등 수많은 방송에서 골프 해설위원 겸 진행자로 활약했으며 신문, 잡지 등에도 꾸준히 골프칼럼을 연재했다. 세계 유명 스타 및 티칭 프로들과 진행한 동영상만 1000편이 넘는다. 골프 스쿨을 비롯해 다양한 골프 관련 사업을 통해 골프 인구 저변 확대에 힘쓰고 있다.

2021-05-21

[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8> 조지아대 약대 주중광 명예교수

주류 사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 주류 사회의 일원이 되고 나아가 그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까지 받는 것. 모든 이민자의 꿈이다. 이를 위해 이민 1세대들은 열심히 땀 흘리며 터를 닦고 씨를 뿌린다. 당대에 안 되면 다음 세대, 또 그 다음 세대에 찬란히 피어날 꽃과 열매를 기대하며. 조지아대학교(University of Georgia) 약학대학 명예교수 주중광 박사도 그런 이민 1세대다. 하지만 주 박사는 탁월한 연구업적을 바탕으로 이미 당대에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명사가 됐다. 대학 교수로는 이례적으로 경제적 성취까지 이루고 그것을 나누는 일에도 열심이다. 한인사회뿐 아니라 주류사회에서도 두루 존경받는 이유다. 지난 4월 29일 오후 둘루스 중앙일보 인근 조용한 카페에서 주 박사 내외를 만났다. 영화 ‘미나리’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 이번에 한국계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로 미국이 난리가 났었죠.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윤여정씨는 74세 나이에 여우조연상까지 받았고요. 초기 한인 이민자들의 어려운 정착기라 할 수 있는데, 어떠셨어요?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이제 보려고 합니다. 스토리는 많이 들었는데 저도 공감이 갔어요. 하지만 저처럼 유학생으로 와 공부 마치고 바로 주류 사회에 들어간 사람은 그런 어려움을 모르지 않을까 생각하는 분도 있더군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떤 분야든 이민자가 주류사회에 비슷하게라도 따라가려면 두세 배 더 땀을 흘려야 하거든요. 언어 장벽은 물론이고 알게 모르게 차별도 존재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이겨내느냐 하는 것이지요.” - 박사님은 그런 길을 헤치고 세계적인 약학자로 우뚝 서셨는데, 어떤 연구를 주로 하셨나요? “전문적인 내용이라 다 설명하기는 그렇고, 에이즈 치료제나 B형, C형 간염 치료제 개발 및 관련 신약 연구에 힘을 보탰다고 하면 되겠습니다. 대학에서 40여년간 줄곧 연구하고 가르쳤죠.” 주 박사는 1964년 서울대 약학과 졸업 후 아이다호 주립대 석사(1970)를 거쳐 뉴욕 주립대 버펄로에서 박사(1974) 학위를 받았다. 1976년 뉴욕 메모리얼 슬론-케터링 암센터 연구원을 시작으로 아이다호 주립대 조교수를 거쳐 1982년부터 지금까지 조지아대학에서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하고 있다. 지금까지 350여 편의 논문, 60여 건의 미국 특허, 130여명의 대학원생 및 박사 후 연구원 양성이라는 학문적 성과를 기록하고 있다. 조지아대 약대(College of Pharmacy) 웹사이트에는 주 교수의 연구 업적과 수상 내용이 몇 페이지에 걸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국제적인 공헌을 인정받은 과학자에게 주어지는 존 몽고메리 어워드(The John A. Montgomery Award, 2014)를 비롯해 안토닌 홀리 어워드(Antonin Holy Award,2017)of Inventors, 2017) 등이다. 자랑스러운 서울대인(2015), 뉴욕주립대 버펄로 탁월한 동문(2017)으로도 선정됐다. - 장학재단을 통해 많은 기부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2011년 아내(허지영)와 함께 주패밀리재단(The Chu Family Foundation)을 만들었습니다. 이 재단을 통해 저나 제 가족과 연관이 있는 미국내 여러 대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Chu Lectureship Award’라 해서 약학 및 신약개발에 우수한 성과를 낸 과학자들을 위한 상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고요.” - 구체적으로 어떤 곳에 얼마나 지원하시는지요? “매년 45만 달러 정도씩 장학금이나 연구기금을 후원합니다. 미국의 비영리재단 규정상 전체 자산의 5%는 기부하게 되어 있거든요. 조지아대학을 비롯해 아이오와대학, 뉴욕 버팔로, 듀크, 유펜 등 7개 대학이지요.” -그 정도 규모라면 재단 규모 또한 대단하겠군요. 실례지만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버셨나요? 대학에서 연구만 하신 과학자로는 이례적이라 할 수 있는데요. “그렇죠. 흔한 일은 아니지요. 열심히 연구하고, 후학들을 많이 배출하다 보니 기회가 왔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산학협력 연구인데, 대학에서 연구 개발한 것을 상품화해서 인류 복지 증진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제가 배출한 제자만 130여명입니다. 그들이 회사를 만들어 그런 일들을 하곤 했는데 저도 관여하게 되면서 소득이 생긴 거지요. 그렇게 마련된 재원으로 재단을 만든 겁니다.” - 기부 대상이 미국 대학이나 주류사회 기관들인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살고 있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요. 물론 ‘봐라, 나 같은 이민자도 이렇게 당당히 미국을 돕고 있지 않느냐’라는 자부심도 있습니다. 미국에선 이민자나 소수계를 늘 도움만 받는 집단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걸 깨뜨리고 싶었습니다. 소수계도 주류사회 못지않게 미국 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있구나 하는 인식을 심어주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 중요한 말씀이네요. 후학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겠군요. “예. 공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삶의 자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다들 이재에 밝고 경제에도 민감합니다. 하지만 저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돈만 좇지 말라, 우선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 돈은 그 다음에 저절로 따라 온다. 그리고 돈을 벌었다면 제대로 쓰는 것도 중요하다고요.” - 공감합니다. 주 박사님의 삶 자체가 그런 정신을 구현하고 있으니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거액을 기부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그것도 재단을 통해서였나요? “아, 그건 아닙니다. 미국 비영리 재단의 해외 지원은 규정이 더 까다롭기 때문에 서울대 기부는 개인적으로 따로 합니다. 또 6.25 참전용사 후손들을 위해서도 매년 10~15명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는데 역시 따로 하고 있고요” 주 박사 부부는 장인이었던 허식 수학과 교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 2019년 서울대 자연대에 3억원(약30만달러)를 기부했다. 그들은 그 전에 이미 30억원 기부 약정을 하고 약대 시설확충 기금 등 다양한 명목으로 서울대에 기부해 오고 있다. 현재까지 총 기부액은 250만 달러가 넘는다. -끝으로 애틀랜타 한인 커뮤니티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교회를 나가니까 한인사회 소식을 많이 듣습니다. 한인 신문도 열심히 읽고요. 한인들이 워낙 부지런해서 이민 생활에 잘들 적응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어려울 때 조금씩 손을 내밀면 큰 힘이 되겠지요.” 주 박사는 틈틈이 한인사회에도 기부를 해왔다. 코로나 사태 초기인 지난 해 5월에는 불숙 애틀랜타한인회를 찾아 한인동포들을 위해 써 달라며 1만 달러를 기탁했다. 또 한미장학재단 남부지부(회장 이영진) 기금 조성에도 적극 참여, 후학들을 길러내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다. ▶ 주중광 박사 1941년생. 어린 나이에 강원도, 부산, 평택 등지로 피란 다니며 6.25를 직접 체험했다. 서울대 약학과 졸업(1964) 후 아이다호 주립대 석사(1970), 뉴욕 주립대 버팔로 박사(1974) 공부 이후 조지아대학 약대 교수로 40년 간 후학 양성과 신약개발에 헌신하고 있다. 지금도 명예교수(Emeritus)로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미국 이름은 데이비드(David Chu)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

2021-05-07

[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7> 신희경 테네시 내슈빌한인회장

지난 주말 테네시주 내슈빌을 다녀왔다. 그곳 한인사회 모습도 보고 한인들 살아가는 이야기도 듣기 위해서였다. 오고가는 고속도로 주변 초록 들판과 희고 붉은 꽃들이 화사하고 눈부셨다. 가던 날 일요일 저녁 마침 내슈빌 다운타운 한복판에서 아시안 혐오범죄 중단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내슈빌한인회 신희경(55) 회장과 함께 행사를 지켜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지난 해 8월 드라이브 스루 방식으로 치러진 경선에서 139표를 얻어 내슈빌한인회장으로 당선된 23대 회장이다. - 한복을 입고 나오셨네요. “예, 이런 행사 때는 일부러 입고 나옵니다. 눈에 잘 띄잖아요. 타인종에게 우리 한인들도 이런 행사에 적극 동참한다는 이미지도 심어줄 수 있고요.” 이날 행사는 여러 아시안 권익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내슈빌한인회도 명함을 내밀고 적극 참여했다. 집회는 테네시한인장로교회 허세림 전도사의 기도로 시작됐다. 이날 신 회장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200여개의 손 태극기를 미리 준비해 행사 참석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오늘 생각보다 한인들이 많이 왔군요. 내슈빌 전체 한인은 얼마나 되나요? “7000명 쯤 될까요. 적게는 6000명, 많게는 1만명까지 보기도 합니다. 통계에 안 잡히는 분들도 많거든요.” 한인 수는 말하는 사람마다 다르다. 내슈빌은 4~5천명 쯤 될 거라는 사람도 있고 1만5000명까지 된다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땐 통계를 봐야 한다. 2019년 자료에 따르면 내슈빌 인구는 67만 명이다. 인종별로는 백인이 65.5%, 흑인 28.6%, 아시안은 3.5%다. 아시안은 23만 명이 조금 넘는다는 얘기다. 한인이 아시안 중 30%쯤 된다고 가정하면 신 회장 말대로 7000명 어림이다. 내슈빌 전체 인구의 1% 정도다. -코로나 시기라 한인회 일 하기가 힘들진 않나요. “대면행사는 거의 못했습니다. 대신 어르신들 찾아 뵙는 일은 꾸준히 하고 있어요. 전화 상담도 많고요. 뭘 잘 못 먹어 체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전화기가 갑자기 안되는데 왜 그런가 등등 주로 사소한 문제 해결 요청입니다. 몇몇 어르신들껜 음식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갖다드리기도 합니다. 가족 없는 분, 앞 못보시는 분도 있고...” 독거 노인들의 사연을 이야기하다 마음이 울컥하는지 말을 잇지 못한다. 이런 봉사 때문인지 신 회장은 시니어 팬들이 많다. 실제로 지난해 드라이브 스루 회장 선거 때 운전도 못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너도나도 다른 차까지 얻어 타고 와서 신 회장에게 투표했다고 한다. -딱한 사연들이 많군요. 다른 한인들은 어떻게들 사는지요? “밴더빌트대학 같은 학교 쪽 관계자도 있고 의사나 전문직 종사자도 꽤 있어요. 주유소나 세탁소, 가게 등 자영업 하시는 분도 물론 많고요. 하지만 한인회 차원에선 딱히 마음 나눌 곳 없는 분들에게 아무래도 관심을 더 쏟은 편입니다. 한인회라는 게 그런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기댈 곳이 되어야 하잖아요. 얼마 전에도 우울증에 빠진 젊은 자매 한 분이 극단적 선택을 하려다가 극적으로 구조된 적이 있었어요. 그 자매를 보살피면서 한국서 온 부모님들과도 함께하며 얘기를 나누었는데 힘들고 어려운 한인들이 필요로 할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단체나 기관이 더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회장 출마 공약을 보니 온라인 소통 활성화가 있던데 성과가 좀 있나요? “한인회장 되기 2년 전부터 내슈빌 한인 카톡방을 준비했어요. 취임 후 더욱 활성화해서 벌써 가입자가 219명입니다. 이 정도면 대단한 거예요. 여기서 소식도 나누고 정보도 나누고 있습니다.” 온라인 소통 활성화를 위해 유명 블로거(닉네임 ‘짭짤한 시인’) 박성춘 시인을 정보통신부장으로 영입한 신 회장은 “박 시인이 한인회에 큰 힘이 되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계획하거나 추진 중인 다른 일은 없나요? “한인회를 비영리법인으로 살려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주 정부 지원금 확보와 기부자들의 세금 공제 혜택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거든요.” 단체를 운영하려면 늘 재원이 문제다. 테네시엔 LG 세탁기 공장과 한국타이어, 삼익악기 등 한국 기업들도 있지만 후원 요청엔 한계가 있다. 결국 개인 독지가들의 참여를 끌어내는게 관건이다. 하지만 기금관리나 행사 후원비 등의 사용처가 투명하지 못하면 그것도 어려워진다. 한인회 자금이 일부 임원들의 전유물처럼 전용되기도 했던 과거의 관행을 끊어보겠다는 것이 신 회장의 각오다. - ESL 교사 출신이라 들었습니다. 영어를 잘 하시니 주류사회 쪽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겠군요. “한인회장 맡기 전에도 한인사회가 주지사 등 지역 정치인과 교류하는데 힘을 보탰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인 커뮤니티의 존재감도 커지는 거니까요. 개인적으로도 한국 문화와 한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타인종 사회에 알리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 끝으로 타 지역 한인사회와 교류는 얼마나 하고 있나요? 조지아, 앨라배마, 테네시 등 동남부 지역은 서로들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한인회도 많고 연합회도 많던데. “솔직히 활발한 교류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모이는 것에만 의미를 두는 자리엔 나가고 싶지도 않고요. 내슈빌 한인 챙기는 것만으로도 저는 너무 바쁘거든요. 동남부한인회연합회라는 단체도 있는데 능력 있는 분들도 많고 활동도 활발하지만 역시 잘 못나갔습니다. 앞으로 취지가 좋고 의미가 있는 행사가 있다면 함께해야겠다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 테네시 출신으로 돌리 파튼(75)이라는 왕년의 인기 가수가 있다. 영화 ‘나인 투 파이브’ 주제곡으로도 익숙하지만 남다른 선행과 미담으로 전 미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컨트리 가수다. 내슈빌에서 만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돌리 파튼 이야기를 했다. 지난해엔 코로나 백신 개발 연구비로 100만 달러를 기부했는가 하면 산불이나 수재로 집 잃은 이재민들을 꾸준히 도왔다는 것이다. 어린이 독서 진작을 위해 31년째 무료로 책을 보내주는 ‘상상 도서관(Imagination Library)’ 사업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자랑스러워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나 선행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그가 나고 자란 곳의 분위기 영향이 컸을 터. 그게 바로 테네시의 풍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내슈빌 한인 중에도 많은 분들이 보이지 않는 선행을 행하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주유소를 운영하며 남몰래 한인 돕기에 앞장서고 있는 현상원(76) 장로, 매릴랜드대학 교수이자 유명 과학자인 찰스 홍 박사의 어머니로 독거 노인들을 위한 통역 봉사에 열심인 홍광자(79) 권사, 4·19 국가 유공자로 표창까지 받고 시니어 섬김의 대명사로 활약해 온 전상의(83) 목사 등이 그런 분들이다. 기회가 되면 한 분 한 분 따로 이야기를 들어도 되겠다 싶어 수첩에 메모를 남겼다. 짧은 방문이었지만 이웃을 살피고, 공동체를 생각하고, 더불어 함께하고자 애쓰고 있는 내슈빌 한인사회를 조금이나마 체험한 것 같아서 애틀랜타로 돌아오는 내내 흐뭇했다. ▶신희경 회장은 1966년생.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캘리포니아주 기독교계 학교에 ESL 정교사로 선발돼 도미했으며 기숙학교 사업과 마약 중독자, 홈리스 등의 사회 적응을 돕는 그룹홈을 운영했다. 내슈빌에는 15년째 살고 있다. 미국 이름은 레베카. 김영배 조지아 해병전우회장이 남편이다. ▶테네시주는 조지아 북쪽에 접해 있는 동서로 긴 주(州,state)다. 노스캐롤라이나, 켄터키, 아칸소, 앨라배마 등 미국 50개 주 중에서 가장 많은 8개주와 주경(州境)을 맞대고 있다. 주도는 내슈빌. 애틀랜타에서 차로 4시간여 거리다. 최근 들어 하루 150여 채의 주택 매매 계약이 이뤄질 정도로 인구 유입이 급증하고 있다. 남서쪽 끝에 있는 멤피스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고향이자 테네시 최대 도시로 연중 관광객이 넘친다. 동쪽 내륙의 녹스빌과 조지아 접경의 채터누가도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거점도시들이다. 테네시는 앤드류라는 이름의 대통령 2명을 배출했다. 한 명은 7대 앤드류 잭슨(재임 1829~1837)이다. 독학으로 자수성가한 서민 출신으로 미국 대중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다. 서부개척을 빌미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축출이라 흑역사도 갖고 있다. 또 한 명은 링컨 대통령의 암살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앤드류 존슨(재임 1865~1869)이다. 남북전쟁 전후 남부에선 배신자로 몰리는 등 어려운 재임기간을 보낸 그는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도 최하위 권에 머물고 있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총 득표수에 앞서고도 선거인단 확보에 뒤져 조지 W. 부시에게 뒤져 대통령 일보 직전에서 멈춘 엘 고어 전 부통령도 테네시 출신이다. 글·사진=이종호

2021-03-26

[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6> 애틀랜타 필하모닉오케스트라 박 민 뮤직디렉터

괜히 나 혼자 속았다. ‘애틀랜타 필하모닉’이라고 해서 여기도 뉴욕 필하모닉, LA필하모닉 같은 시립교향악단이겠거니 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사설 민간 오케스트라였다. 그래도 역사나 규모, 공연 활동을 보면 만만하게 볼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서 이런 정도의 오케스트라를 한인이 창단해 30년 가까이 운영해 오고 있다는 것도 대단했다. 애틀랜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Atlanta Philharmonic Orchestra) 박민(61) 단장. 건네받은 명함에는 오케스트라뿐 아니라 합창단, 오페라단에 음악학교까지 운영하는 CEO 겸 뮤직디렉터라고 적혀있었다. 얘기를 나누면서 자동차 정비소를 30년 가까이 운영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남다른 이력을 가진 박민 감독의 애틀랜타 음악 활동 30년을 들어봤다. - 처음엔 이름만 보고 애틀랜타시가 운영하는 교향악단인줄 알았다. “그런 이야기 많이 듣는다. 시에서 재정을 대는 곳은 필하모닉이 아니라 심포니다. 애틀랜타 심포니. 하지만 우리도 역사가 23년이다. 태동기까지 합치면 30년이 다 되어 간다. 연주자도 대부분이 미국인이다. 조지아에선 애틀랜타 심포니 못지않은 연주 활동을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 서울대 음대 출신이다. 전공 악기가 뭐였나? “트럼펫이다. 미국 오기 전 서울시향 등에서 객원으로 트럼펫을 불었다. 대한민국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도 활동했다. 지휘자 금난새 선생과 함께 대만 순회 연주 다녀온 기억이 생생하다.” - 지금도 트럼펫을 부나? “그렇다. FBA(First Baptist Church Atlanta)라고 미국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교회 부설 오케스트라인데 이곳에서 17년째 트럼펫 연주자로 참여하고 있다. 지난주에도 함께 모여 연습했다” - 그래도 주된 활동은 지휘나 기획, 연출 쪽인 것 같은데. “한국 있을 때부터 오페라나 가극 연출에 관심을 가졌다. 서울시립오페라단, 서울오페라단 등에서 일을 했다. 부산시민회관에 올렸던 오페라 토스카 조연출을 갑자기 맡아 정신없이 뛰었던 일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지금도 그런 쪽 일이라면 신명이 난다.” - 미국에는 언제 왔나? “1987년이다. 뉴욕으로 왔는데 다들 그렇듯이 음악 공부를 더 하려 했다. 하지만 미국 생활을 하면서 생활과 접목된 실용음악 쪽에 눈을 뜨게 됐다. 아무리 멋진 연주도 관객이 외면하면 소용이 없지 않은가. 누구든 친근하게 듣고 즐기는 음악, 연주자 입장에선 연주 자체가 즐겁고 신나는 음악이어야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우리 애틀랜타필하모닉이 바흐부터 조용필이나 K팝에 이르기까지 장르 가리지 않고 다양한 연주를 시도하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 애틀랜타필하모닉을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달라 “1998년에 정식 창단했다. 처음 출발은 1993년 애틀랜타 예술제 때였고 이후 1995년에 시작한 청소년 연주자 중심의 유스(Youth) 오케스트라가 실질적인 전신이었다. 현재는 각 파트별로 12명의 수석연주자들이 있다. 코로나 직전 전체 유급단원만 38명이었다. 다민족이 사는 미국에서 음악을 통해 인종 간, 민족 간의 벽을 허무는 것이 우리 오케스트라의 창단 목적이다.” - 기억에 남는 공연을 꼽는다면.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음악회’이 인상적이었다. 둘루스 인피니티에너지아레나에서 ‘평화와 화합의 대합창’을 주제로 열렸는데 조지아 한인사회 화합뿐 아니라 한국 문화 수준을 주류 사회에 알리는데도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 공연으로 올린 창작마당극 ‘봄봄(Spring, Spring)’도 대단했다. 한국 문화와 정서를 담은 오페라가 풀(full) 프로덕션으로 애틀랜타 무대에 올려 진 것은 처음이었다.” - 오케스트라를 운영한다는 게 힘들지는 않나?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솔직히 열정만으로는 밥 먹고 살기가 힘들다. 문화나 예술 활동은 기본적으로 그것을 이해하고 성원하는 든든한 후원자들이 있어야 하는데 미주에선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그래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했다. 가족 생계도 해결하고 오케스트라 운영 등 음악 활동도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아내에게도 덜 미안해 할 수 있었다.” - 정비소라니? “로얄오토월드라는 바디숍을 30년 가까이 했다. 2018년까지 하고 접었는데 나름 할 만 했다. 잘 못믿으시겠지만 의외로 자동차 정비가 악기 연주와 많이 닮았다.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한 것도 그렇고 자동차나 악기나 마찬가지로 손으로 만지는 것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가 요구되는 것도 비슷하다.” -그래도 손에 기름 묻히는 일인데 힘은 들었을 것 같다. “나는 괜찮았지만 아이들은 좀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서울대 나오고 오케스트라 단장까지 한다는 음악인 아빠가 기름때 묻혀가며 정비 일을 하고 있으니까 도대체 아빠 정체가 뭔가 했던 것 같다. 아들 하나는 나처럼 음악을 좋아했고 소질도 있었지만 정비 일 하는 (가난한)아버지를 보면서 음악하겠다는 마음을 바꾸겠다고 했을 때는 정말 눈물이 났다. 전적으로 밀어주지도 못할 거라 말리지도 못하고, 가슴이 많이 아팠다.” - 애틀랜타에서만 음악 활동 30년이다. 보람이 있었다면. “다민족 사회인 미국에서 음악으로 화합과 교감의 창구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게 큰 보람이다. 한인들에게도 위로와 자부심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또 예술가를 꿈꾸는 젊은 친구들에게 장학금을 주거나 연주 무대를 마련해 준 것도 기쁨이었다. 재주 많고 능력이 출중한데도 무대에 설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연주자들이 많은데 앞으로도 그런 친구들에게 실질적인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계속할 수 있다면 더 큰 보람이 없을 것이다.” 얘기를 듣다보니 금세 두 시간이 흘렀다. 한 마디 질문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쉼 없이 답변이 이어졌다. 음악 인생으로만 30여년을 달려왔고 또 그 만큼 쌓인 사연도 많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천성적으로 바지런하고 판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 만큼 지금의 코로나 상황이 몹시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이렇게 멈춰서 보기도 하고 지난 활동을 돌아보며 숨고르기도 할 수 있으니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 듯 싶었다. 코로나의 긴 터널도 이제 서서히 끝이 보이는 듯하다. 모두가 예전처럼 다시 활동하는 날이 오면 박민 단장은 또 어떤 프로그램으로, 어떤 날갯짓을 펼쳐 보일지 기대가 된다. ▶박민 단장은… 지휘자 겸 뮤직디렉터. 서울대 음대 기악과(80학번) 졸업. 1990년대 초반부터 조지아에서 음악활동을 했다. 애틀랜타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한인회관 건립 기금모금 음악회, 평창 동계올림픽 성공기원 음악회 등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고 성황리에 이끌었다. 오케스트라 외에도 합창단, 음악학교, 아트센터 등도 함께 운영 중이다. ▶오케스트라는…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타악기 등 종류가 다른 여러 악기들을 한데 묶어 합주하는 교향악단이다. 관현악단이라고도 한다. 대부분 심포니(Symphony)나 필하모닉(Philharmonic)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유래는 조금 다르지만 큰 차이 없이 사용되고 있다. 심포니는 ‘함께 울린다’는 뜻이고 필하모닉은 ‘음악 애호가’라는 뜻.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케스트라로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1842년 창단)과 뉴욕 필하모닉(1842년 창단), 베를린 필하모닉(1887년 창단), 런던 심포니(1904 창단)등이 있다. 글·사진=이종호

2021-03-12

[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5> 애틀랜타 전등사 주지 수인스님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 발표 한국의 종교 현황을 보면 불교 인구 비율은 15.3%다. 사람 숫자로는 800만 명 가까이 된다. 개신교(19.7%)보다는 조금 적고 천주교(7.9%)보다는 두 배쯤 많다. 가장 많은 비율은 ‘아무 종교도 없다’로 56%에 이른다. 하지만 미주에서의 체감 종교 인구 분포는 확연히 다르다. 한인사회의 웬만한 사람은 다 교회 집사, 장로 아니면 권사다. 절에 다닌다는 처사, 거사, 보살은 거의 만나보기 힘들고 그런 용어조차도 낯설다. 실제로 조지아 애틀랜타만 해도 한인 교회만 200개가 넘지만 불교 사찰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도 미국에서도 불교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높아지고 있고 그에 부응해 한국 사찰도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미주불교신문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내 한국 사찰은 뉴욕과 남가주를 비롯해 전국에 100여 곳이 넘는다. 하지만 대부분 영세하고 활동도 기독교나 천주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한 편이다. 그런 상황에서 애틀랜타 전등사는 미국 동남부 지역의 대표적 사찰로 비교적 시설이 크고 운영 시스템도 잘 갖춰진 편에 속한다. 지난 19일 오후 중앙일보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전등사를 찾아 주지스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2012년에 미국에 왔다는 비구니 수인스님이다. - 절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네요. “예. 전체 부지가 5에이커가 넘습니다. 큰 법당도 있고 탬플스테이 할 수 있는 제반 부대시설도 두루 갖췄죠. 이제 곧 봄이 올 텐데 꽃도 피고 훨씬 더 좋을 겁니다.” 한국의 절은 대부분 높은 산 깊은 골, 산의 정기가 응집된 풍광 좋은 명당에 터를 잡고 있다. 또 이끼 낀 돌탑과 빗자루 자국 선명한 뜰, 주변 수목과 어우러진 그윽한 향내, 새소리 바람소리와 조화 이룬 목탁 소리는 꼭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절을 찾는 이들로 하여금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애틀랜타 전등사도 그런 분위기가 역력했다. 넓은 잔디밭과 잘 정돈된 주변 조경, 아기자기하게 놓인 작은 돌탑과 공덕비에 부도까지, 한눈에도 이곳이 수행도량이라는 게 느껴졌다. - 1992년에 애틀랜타 전등사가 세워졌다고 들었습니다. 내년이 30주년이군요. “예. 3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의미 있는 행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은퇴하고 회주로 있는 마야 큰스님이 오래 전 창건하고 기반을 닦으셨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미국에서 불교 사찰로 건축 허가받는 것부터 쉽지가 않잖아요. 이곳 법당 건물도 반은 상업용(커머셜), 반은 주거용(레지덴셜)로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 이런 한국 절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크지요.” 원래 전등사는 강화도에 있는 절 이름으로 불교 전래 직후인 서기 381년에 창건된 한국 최고(最古)의 고찰이다. 이곳 전등사도 30년이면 미국에선 비교적 오래된 절에 속한다. 전등(傳燈)이란 ‘불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이다. - 이 정도 규모를 유지하려면 신도가 꽤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예. 코로나 사태 전에는 매주 60~70명 정도 모였지요. 40~50대가 많았고 아이들도 꽤 있고요. 올해 부처님오신날부터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오신날은 음력 4월 8일로 1975년 석가탄신일이라는 명칭으로 국가 공휴일이 됐다. 2017년에는 공식적으로 ‘부처님오신날’로 이름이 변경됐다. 불교는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처음 한반도에 전해진 이래 신라, 고려를 거치면서 1000년 이상 민족 종교로 자리매김해 왔다. 숭유억불 정책의 조선시대에도 사월초파일 만큼은 성대하게 지켜졌다. 올해 부처님오신날은 양력 5월 19일이다. -전등사에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하나요? “매주 일요일 11시 정기법회가 있고 점심 공양 후엔 신도님들끼리 참선이나 합창반 같은 특별 활동도 합니다. 아이들이나 청년들은 따로 또 프로그램이 있고요. 가끔 국내외 큰스님이나 명사들을 초청해 법회도 합니다. 외국인들을 위한 영어 참선 프로그램도 인기가 있어요. 요즘은 코로나라 온라인으로만 만나고 있지만요” - 역시 코로나가 문제군요. 운영이 힘들진 않은가요? “괜찮습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내는 거지요. 출가한 승려가 보석을 사겠습니까, 좋은 차를 굴리겠습니까. 가족이 있어 물려줄 것도 아니고요. 공수래공수거라 했듯이 처음부터 내 것이 없었고 나중에 가져갈 것도 아니니 욕심 부릴 필요도 없는 거지요.” 하긴 원래 절이란 무상무념, 무소유 등 무(無)의 기품이 서린 장소가 아니던가. 원효-의천-지눌-휴정-경허의 뒤를 이어 현대 한국 불교의 큰 산으로 우뚝 서 있는 성철스님도 평생을 덕지덕지 기운 누더기 한 벌로 살았다. 수많은 베스트셀러 책을 펴낸 스타 작가이자 불교 대중화에 큰 족적을 남긴 법정스님의 유품도 필기구와 책 몇 권, 손목시계가 전부였다. - 아무래도 여기가 미국이니까 외국인 신자도 있을 것 같은데. “신자라기보다 명상이나 수행 등 동양적인 것, 불교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오시는 분들이 제법 있습니다. 불법에 정통하고 영어도 잘 하시는 법사님 한 분이 모임을 이끌고 있지요.” 단아한 다기세트에 마주 앉아 스님이 손수 준비한 차를 마셔가며 대화는 이어졌다. 중국 전통 보이차라고 했다. 첫 물은 버리고 두세 차례 우려낸 선홍색 차 빛깔이 맑고 고왔다. 방안 가득 그윽한 다향(茶香)이 배일 즈음 문득 바깥 인기척이 들렸다. 스님이 일어나 합장으로 맞은 사람은 젊은 부부였다. 두 사람은 조용히 법당으로 들어가 10분 남짓 머물다 돌아갔다. “중국인 부부랍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자주 와서 기도하고 가곤 하지요. 중국인들이 가끔 이렇게 찾아옵니다. 조지아에 중국 절도 있지만 아무래도 머니까 가까운 저희 절에 부모님 위패나 사진을 갖다놓고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하긴 부모의 극락왕생을 비는데 한국 절이면 어떻고 중국 절이면 어떠랴. 종교는 이렇게 민족도 초월한다. - 절 살림을 혼자 다 꾸리자면 어려움도 있겠어요. “그렇긴 하죠. 그래서 한국서 새로 스님 한 분이라도 모셔오려고 합니다만 쉽지가 않네요. 일반 사람도 아니고 비구니 스님이 미국에 온다는 것, 정말 큰 결단을 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래도 이곳은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낫습니다. 제가 2012년에 왔는데 그때도 이미 마야 회주스님께서 재정, 법률 등 복잡한 일은 회계사나 변호사 등 전문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놓았더군요. 또 법회나 행사 때는 신도님들이 알아서들 다 도와주시고요.” - 미국 생활하시면서 한국 비구니로서 부딪치는 문제는 없는지요? “미국이라서 힘든 점은 없습니다. 제가 외모나 복장에서 성직자라는 게 드러나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대부분 예를 갖춰 대해줍니다. 오히려 한국 분들 중에는 너무 무례하거나 막무가내인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넘기지만 때론 난감하죠. 그리고….” 스님은 더 말을 이으려다 그냥 웃으며 멈췄다. 이심전심. 심중에 무슨 말이 담겼는지 알 것 같았다. 내 신앙이 소중하다면 타 종교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와 배려도 필요하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더불어 사는 현대 생활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무지는 편견을 부르고 무식하면 무례할 수밖에 없다. 편견과 무례는 갈등과 반목으로 이어진다. 용서와 화해를 가르치는 종교가 오히려 화평과 소통의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겠다. 불교는 포용의 종교다. 한국 불교의 태두 원효대사도 1300여년 전 이미 소통과 상생을 부르짖으며 종파 간 모순과 대립을 넘어선 원융무애(圓融無礙)를 설파했다. 일체의 막힘이나 분별, 대립이 없이 두루 통하는 상태를 말한다. 다원화 시대인 지금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모든 영역에서 꼭 필요한 정신이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바깥으로 나와 경내를 둘러보았다. 법당 뒤로, 옆으로 쭉쭉 뻗어 오른 소나무들이 그런대로 산사 다운 풍광을 자아냈다. 기독교 나라 미국에서 먹물 옷 입고 한국 불교 전통 방식에 따라 수행하며 불법의 등불을 전하고 있는 전등사 비구니 스님, 그의 존재 자체가 이 땅의 다양성과 화평, 공존의 상징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절문을 나섰다. ▶주소= 900 Beaver Ruin Road, Lilburn, GA 30047 ▶수인스님은 출가한 지 30년이 됐다. 미국에 온지는 이제 10년이 다 되어 간다. 전등사에 오기 전 20년쯤 충청도에서 보냈다. 그동안 한국은 두 번 다녀왔는데 가서 보니 이젠 오히려 미국이 더 편한 것 같다고 한다. 신도들이 평정심을 구하고 삶의 위로를 얻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생활 속 불교 용어 불교 용어는 어렵다. 하지만 생활 속에 무심코 쓰는 말들 중에 불교 경전에서 유래된 용어가 많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불가사의 :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 ▲아수라장 :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현장 ▲아비규환 : 지옥의 하나로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 ▲야단법석: 원래 불법을 듣기 위해 마련된 야외 장소로 사람들이 몰려 왁자지껄한 모습을 묘사하는 말. ▲이판사판; 원래 절에는 이판승(수행 중심)과 사판승(사찰 운영 중심)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막다른 기로에서 하는 마지막 선택이었다는 의미에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

2021-02-26

[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4> 리 장의사’ 이국자 대표

“장수시대일수록 웰다잉 준비도 잘 해야” 불교 경전 ‘법구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걸음마를 시작하던 아이가 갑자기 죽었다. 비통에 빠진 엄마는 아이를 되살릴 약을 찾아다니다 붓다에게까지 나아갔다. 붓다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찾아가 겨자씨 한 줌만 얻어오면 아들을 살릴 수 있다.” 여인은 기뻐하며 그 약을 찾아 나섰지만 곧 알게 됐다. 세상에 그런 집은 없다는 것을.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죽음은 순서가 없다. 부자와 빈자, 높은 자 낮은 자,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가리지 않는다. 천하의 진시황도 불로초는 구하지 못했다. 삶이 한 번뿐이 듯 죽음도 연습이 없다.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고,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죽음. 가 보지 않은 길이어서 무섭고, 자신이 관여해 온 모든 관계와 소유로부터 격리되는 절대 고독의 세계라 더 두렵다. 그렇지만 죽음은 현실이다. 날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고 듣고 접하며 산다. 매 순간 어디에선가는 고인을 보내는 장례 의식도 치러진다. 지난 달 25일 애틀랜타 한인 사회 대표적 장례업체인 ‘리 장의사(Lee’s Funeral Home & Crematory)‘ 이국자 대표를 만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코로나 희생자가 많다는 보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더 바빠지셨겠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는 평소 때와 비슷합니다. 오히려 코로나 때문에 운영만 힘들어졌어요. 장례 절차가 간소화되고 유가족들이 문상객도 받지 못하잖아요. 당연히 장례에 지출하는 비용도 줄었습니다.” 뜻밖의 대답이었다. 코로나 희생자가 그렇게 많다는데, 장례식장이 불황(?)이라니. 말은 그랬지만 인터뷰 당일 이국자 대표는 무척 바빴다. 한 시간 남짓의 만남이었지만 대화는 몇 분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끊기곤 했다. 두 개의 전화기를 통해 끊임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 때문이었다. “사람이 시간 정해놓고 죽는 게 아니잖아요. 죽음이란 누구나에게 다가오지만 순서도 없고 예고도 없어요. 그러니 24시간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오래 이 일을 해서 그런지 아직도 사람들이 저를 많이 찾네요.” 하긴 그렇다. 코로나가 아니어도 세상 뜨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그들의 마지막 길을 위해 누군가는 또 바삐 움직여야 한다. 만남 약속을 두 번이나 미룰 수밖에 없었던 게 이해가 되었다. - 들어오는 입구에 보니 간판이 한글, 영어, 한자, 베트남어 등 4개국어로 되어 있던데요. “애틀랜타가 다민족 사회잖아요. 우리 장의사도 이용자가 한인이 40%, 베트남계가 40%, 나머지 중국계와 히스패닉 등이 20% 정도 됩니다.” -미국 장례식은 한국과는 많이 다릅니다. 어떤 것 같습니까? “미국 장례는 망자가 주인공입니다. 장례식도 고인을 애도하고 살아생전 모습을 함께 추억하는 쪽으로 진행이 되지요.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망자보다는 후손들의 자기과시 무대처럼 보였습니다. 주인공도 고인이 아닌 살아있는 아들이나 유가족인 경우가 많고요.” 그의 말대로 망자가 주인공이 되는 미국 장례식은 한인들에겐 많이 낯설다. 특히 처음 이민 온 한인들은 고인의 주검을 실제로 보며 마지막으로 추모하는 뷰잉(viewing) 순서에 적잖이 당황한다. 대신 미국 장례식이 편한 점도 많다. 3일장이니 5일장이니 해서 유족들이 밤새우며 상가를 지키지는 않아도 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 장례 시설이 아주 크네요. 화장터도 같이 운영하신고요? “말로 듣는 것보다 직접 한 번 둘러보시지요.” 그러면서 이국자 대표는 이곳저곳을 시설들을 보여주었다. 제일 먼저 데려간 곳은 사무실 옆 관(棺) 전시장. 영화에서나 보던 화려한 모양의 관들이 수십 개 놓여 있고 관 앞에는 2000불 남짓에서 2만 불 가까이 되는 가격표가 다양하게 붙어있었다. “비싼 관은 중국인들이 많이 찾습니다. 비싸게 돈 들이면 자손들이 그 이상 돌려받는다는 믿음이 있거든요. 하지만 요즘은 화장이 많이 늘면서 중국인도 점점 실속 위주로 바뀌고 있습니다. 한인들은 전부터 그랬고요.” 이어 찾은 곳은 장례식이 진행되는 예배당. 중대형 교회 예배당 정도의 넓은 공간이다.“300명 쯤 수용할 수 있어요. 이런 시설이 둘인데 지금은 거의 활용을 못하고 있어요. 요즘은 사람이 못 모이잖아요. 많아야 몇 십 명 정도 모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1년째 지속되는 코로나 사태는 고인을 기리는 방식까지 크게 바꿔놓았다. 문상은커녕 유가족조차 비대면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온라인 장례식도 늘었고 드라이브 스루 문상이나 야외 주차장 자동차 안에서 장례를 보는 ’드라이브 인‘ 장례식까지 등장했다. “우린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시안들은 코로나로 돌아가신 분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도 미국 전체 분위기가 그리니 장례도 간소하게 될 수밖에 없죠.” 끝으로 화장(火葬) 시설을 둘러봤다. 예배당 뒤쪽의 호젓한 공간. 대여섯 평 남짓 될까, 유가족 대기실이 있고 한쪽 유리창 너머로 네모난 방 속에 커다란 소각로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장방형의 화장 기계(?)는 단출했고 내부는 깔끔했다. 아, 저곳이 사람 몸이 순식간에 한 줌 재로 바뀌는 곳이구나. 깊은 적막 속에 공기마저 처연하게 느껴졌다. 잠시 상념에 젖고 있는데 이국자 대표가 정적을 깨트리며 말을 이었다. “다른 장의사에서도 많이 이용하지요. 이런 게 두 개 있거든요. 요즘은 미국도 화장이 많이 늘었고요. 원래 미국이 기독교 문화권이라 매장이 많았지만 여기는 80%가 화장입니다.” - 요즘은 웰다잉(Well-dying)에 대해 부쩍 관심이 늘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웰빙(Well-being)에 대한 관심 못지 않아요. 매일 죽음을 접하는 장례 전문가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십니까. “100세 시대라고 하니까 너도나도 100세까지 산다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니 죽음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수명이 늘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준비를 해야 합니다. 본인이 원하는 장례 방식이나 장지 등도 미리 생각도 해 보고 유서에 기록해두는 게 필요하죠. 생명보험이나 장례보험도 있어서 자손들에게 부담되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 두는 것도 좋습니다.” 웰다잉은 어떤 죽음이 더 인간다운 죽음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어떤 죽음이 더 품위있고 존중받는 죽음일까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장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국자 대표의 지적대로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지만 나와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 문제다. 이쯤에서 화제를 바꿨다. - 봉사도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많이 했었죠. 한인회도 오래 했고 평통도 하고 이런저런 협회도 많이 했고요. 지금은 딱 세 개만 합니다. 한국학교와 천사포, 소녀상 관련 봉사죠.” 그는 현재 애틀랜타 한국학교 이사장이다. 2년 임기를 마치고 작년에 연임했다. 작년엔 코로나 와중이지만 새 사무실도 마련했다.“커뮤니티의 명망가들이 함께해 주고 있어 감사하지요. 학생이 400여명, 선생님도 40~50명쯤 됩니다.” 천사포 활동은 10년 넘게 지속해 온 애틀랜타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불우 이웃 돕기 프로그램이다. 매년 각계각층이 10불부터 1000불 이상까지 각계각층이 참여해서 더 뜻이 깊다고 했다. 나머지 하나는 소녀상 돌보기다. “소녀상은 보편적인 인권 문제, 여성 문제 등을 다 함축하고 있잖아요. 의미가 큰 곳이죠. 지금도 가끔씩 찾아가 청소도 하고 그래요” 애틀랜타 소녀상은 캘리포니아 글렌데일과 미시간주 사우스필드에 이은 미국에서 세 번째로 지난 2017년 6월말 브룩헤이븐시 블랙번공원에 세워졌다. 지난 1월 조지아 연방상원 결선에 나서 당선된 존 오소프(민주당) 의원의 어머니도 애틀랜타 소녀상 건립을 적극 후원했던 게 밝혀져 화제가 됐었다. - 긴 시간 감사합니다. 끝으로 한말씀만 더 하신다면. “제가 1943년생입니다. 나이가 적진 않지만 아직은 은퇴 생각은 하지 않고 있어요. 일할 수 있을 때 더 해야죠. 여전히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보람 아니겠습니까. 일이 곧 건강비결이기도 하고요.” ☞이국자 대표는 독일 파송 간호사 출신이다. 1969년에 미국에 왔고 1971년부터 애틀랜타에 살고 있다. 1999년부터 22년째 리 장의사(4067 Industrial Park Dr. Norcross, GA 30071)를 운영 중이다. 글·사진=이종호

2021-02-12

[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3> 사진동호회 ‘아사동’ 회원 폴 황씨

사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찍을 수 있고 조금 더 깊이 파고들면 작가도 될 수 있다. 물론 기술 진보의 덕이 크긴 하다. 무겁고 어렵고 복잡한 고성능 카메라 대신 요즘은 스마트폰 하나로도 얼마든지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 사진 찍기도 마찬가지다. 좀 더 남다르게, 좀 더 전문적으로, 나아가 가능한 한 예술적으로 찍고 싶어 한다. 그러자면 공부가 필수다. 전문가의 조언도 듣고 이론도 익혀야 한다. 함께 출사도 나가고 때론 전시회도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 모인 곳이 사진동호회다. 조지아엔 ‘아사동’이라는 사진동호회가 있다. ‘아틀란타 사진 동호회’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으로 인터넷 기반의 동호회다. 사진을 통해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인들의 삶의 모습을 나누고 각 지역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것이 설립 취지다. 슬로건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땅의 모습’이다. 2006년 9월 출범, 등록 회원은 1000명이 훨씬 넘는다. 애틀랜타를 중심으로 하지만 미국 전역은 물론 한국서 가입한 회원도 있다. 회원 숫자만 봐서는 미국에서 회원이 가장 많은 한인 사진동호회일 수도 있겠다. 아사동 웹사이트(asadong.org)를 들어가 봤다. 아마추어가 봐도 멋진 사진들이 첫 화면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공지사항이나 자유게시판, 출사, 정보 토론방 등을 일별하면서 무척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느껴졌다. 사진 동호회 불모지였던 애틀랜타에 아사동이 이렇게 자리잡은 데는 동호회 설립을 주도한 폴 황(51)씨의 역할이 컸다. “평소 사진을 좋아해 이민 오자마자 사진 동호회가 있으면 가입해야지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고요. 그렇다면 아예 내가 하나 만들지 뭐, 하고 그냥 시작했어요. 그게 2006년이었으니 벌써 15년 전이네요.” 컴퓨터 관련 일을 하면서 틈틈이 사진 일도 한다는 폴 황씨는 동호회 회원들이 늘어나자 나름대로의 철학으로 동호회를 이끌었다. “저희는 회장이니 총무니 하는 리더 그룹이 없습니다. 그냥 웹사이트 운영하고 관리하는 4명의 스태프만 있을 뿐입니다. 사진이 좋아서 모인 사람들끼리인데 그거면 되는 것 아닌가요.” 황씨의 의지대로 아사동은 4가지가 없는 동호회로 자리잡았다. 첫째, 고수와 하수, 신입과 고참의 구분이 없다. 회원은 모두 평등하다는 말이다. 둘째, 남녀노소, 장비 귀천이 없다. 어떤 종류의 카메라로 찍었건 존중하며 사진을 감상하면 된다. 셋째, 가입조건이 없고 회비도 없다. 누구든지 사진 좋아하는 사람이면 들어와 마음 편히 활동하면 된다. 끝으로 영리 사업이 없다.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니까 만남도 건전하다. 당연히 비즈니스를 염두에 둔 신경전도 없고 헤게모니 다툼도 없다. 이런 4무(無)의 전통에서 생겨난 게 아사동만의 특이한 문화다. 우선 회원끼리는 서로 이름이나 나이를 묻지 않는다. 회원 간에는 반말도 하지 않고 호칭도 온라인상의 닉네임으로 부른다. 그래서 몇 년을 같이 활동을 했어도 서로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폴 황씨는 동호회에선 ‘지춘’으로 통한다. (‘지춘님’을 소개한 사람은 ‘레일라님’이다. 두 사람은 인터뷰 당일 함께 자리 했으면서도 정말 서로의 본명도 나이도 몰랐다.) 회비도 없다는데 동호회가 어떻게 운영이 될까. 서버 확장이나 시스템 관리 등 웹사이트 유지비만 해도 상당할 것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늘 익명의 기부자들이 나타나 필요를 채워주고 있다며 황씨도 신기해했다. “애틀랜타에서 사진 동호회 활동이 쉽진 않아요. 기막히게 멋진 자연 풍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도시다운 활기찬 일상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보통 사진만 생각한다면 별로 찍을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회원들 사진을 보면 정말 ‘쥐어 짠’ 사진이 많아요. 그만큼 열심히 찾고 생각하고 찍는다는 말이죠.” 사진에 대한 회원들의 열정과 관심을 이렇게 에둘러 겸손하게 표현했지만 그 속엔 회원들에 대한 자부심은 그대로 묻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은 동호회 활동에 관여하지 않는 평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설립자로서 아사동에 대한 여전한 관심과 사랑도 느껴졌다. “매년 전시회도 개최하고 사진 분야별로 다양한 소그룹도 운영되고 있습니다. 조지아 지역 내에서는 매월 교육이나 출사 프로그램도 정기적으로 열리고요. 물론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나서는 많이 중단됐지만 상황만 나아지면 언제든 다시 재개될 겁니다.” 그의 말대로 어서 빨리 코로나라는 터널이 끝나고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폴 황씨는 1969년생. 초중학교 동창이었던 동갑 아내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컴퓨터와 IT 관련 일, 디자인, 어카운팅 등 다양한 일로 생업을 이어간다. 굳이 안 주겠다는 그를 설득해 겨우 건네받은 명함엔 뜻밖에도 포토그래퍼와 그래픽디자이너 외에 '공인 드론 조종사(Certified drone pilot)'라는 직함도 올라가 있었다. 이종호 기자

2021-02-04

[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2> 아틀란타한인교회 김세환 담임목사

아틀란타한인교회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코로나19 여파를 피하지는 못했다. 50주년이라고 해서 꼭 거창한 예배나 행사를 열어야 하는 건 아니다. 기념 역사서 편찬, 우물 파기 지원, 기념 로고 제작 등 50년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남기는 일은 조용히 진행 중이다. 그 중심에 김세환 담임목사가 있다. 지난 21일 아침, 애틀랜타 중앙일보 이종호 대표가 김세환 목사를 만났다. - 50년이면 교회 역사가 거의 애틀랜타 한인사회 역사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오래됐다고 해서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이 되는 건 아닙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고, 교회 역사가 한인사회 전체의 역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공감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커뮤니티에 선한 영향력도 행사하고 교회가 제시하는 삶의 방식이 한인들을 위한 것이 되도록 더 노력해야겠죠.” 실제로 김 목사의 얘기는 빈말이 아니다. 메이슨빌에 조성한 두레마을 농장은 처음부터 장애인이나 홈리스, 사역에 지친 목회자들은 물론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작년 코로나 사태 초기 때는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마스크도 만들어 병원, 경찰서, 양로원 등에 나누어 주었다. 매주 목요일 봉사자들이 만든 마스크는 무려 1만2000장이나 됐다. 재정이 어려워진 주변 교회들의 렌트비를 대신 납부해준 일도 다반사다. 김 목사는 “본인도 어려우면서 더 어려운 사람 도와주라며 돈을 가져오는 교인도 많다”면서 “그때마다 정말 자랑스럽고 고맙다며 교인들에게 진심으로 고백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50주년인데 뭔가는 했을 것 같아요. “50주년 기념 로고 콘테스트를 했는데 1000여 명이나 참여했어요. 교회 역사를 담은 달력도 만들었고요. 코로나 사태 전에 아프리카 라이베리아 간타마을에 우물과 화장실, 세면시설 등을 지원해 29개 시설을 완공하기도 했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시간이었죠.” - 저처럼 LA에서 오셨는데 와 보니 어떻던가요? “처음엔 너무 추웠습니다. 하지만 이젠 이곳 날씨가 더 좋습니다. 무엇보다 애틀랜타는 저에겐 회복의 사역지입니다. 지내보면 아시겠지만 애틀랜타 한인들은 대부분 순박하고 신앙적으로도 열정이 넘칩니다. 제가 좀 우직한 면이 있어서 타협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목회하면서 나름 어려움도 겪곤 했는데 애틀랜타 교인들의 애환에 공감하고 다양한 삶을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하게 되면서 오히려 제가 회복이 되더군요.” 김세환 목사는 서울 감리교신학대(82학번)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으로 유학 와 캔사스주 세인트 폴 신학대학원(목회학 석사)을 다녔고. 캔자스주 위치타 한인연합감리교회에서 10년간 사역했다. 2007년부터 LA연합감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다 2015년 6월 아틀란타한인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 요즘 교회가 많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비판도 많이 받고요. 그런데 목사님 오신 이후 이 곳은 더 많이 성장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가요? 하지만 저는 경쟁하고, 경영해서 교회가 커지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민 교회는 이민자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돕고 그런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면 그걸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아틀란타한인교회는 미국 연합감리교단(UMC) 소속인데 교단이 최근 성소수자 정책 수용 여부로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뉴스에서 자꾸 연합감리교회들이 동성애를 찬성한다고 하는데, 쉽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물론 저는 동성애엔 분명히 반대합니다. 성경에도 (동성애를) 반대하라고 나와 있고요. 하지만 기독교 교리적 측면에서 보면 동성애자도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인권도 보장되어야 합니다. 약자는 누구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정신이고 그 연장 선상에서 성소수자들의 인권도 존중하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종교는 법처럼 강제하거나 의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좀 더 넓게 생각해야 합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과 신앙의 정통성이나 종교적 진리를 지키려는 마음 사이에서 기독교인들이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김 목사는 만남 내내 교회가 가는 길이 타협으로 비치는 걸 경계했다. 대신 “우리는 복음에 대한 믿음과 헌신의 마음으로 기독교인이 됐고, 목사가 됐다”며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실제 삶의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접근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목회하시면서 꼭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원칙 같은 게 있습니까. “언젠가도 비슷한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 한자 사자성어로 정리한 5가지가 있습니다. 화광동진(和光同塵), 유약겸하(柔弱謙下), 여민동락(與民同樂), 여조삭비(如鳥數飛), 본립도생(本立道生)이 그것입니다.” 김 목사는 이에 대해 신앙의 기본에 충실할 것(본립도생-기본에 충실해야 언제나 길이 열린다), 늘 공부하고 배울 것(여조삭비-새도 끊임없이 날갯짓하지 않으면 추락하는 것처럼 목사도 공부하지 않으면 금세 바닥이 드러난다), 늘 교인들과 함께 웃고 웃을 것(여민동락-백성과 동고동락하는 리더라야 진정한 리더), 항상 겸손할 것(유약겸하-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이다. 마지막은 너무 앞에 나서지 말 것(화광동진-빛을 감추어 티끌 속에 함께 묻히게 하라는 말로 혼자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김 목사는 부임 직후 설교 방송을 모두 내렸다. 김 목사는 “LA고 어디고 다 방송이 나가고 있었다”면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지원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거기도 훌륭한 목사님들이 많은데 굳이 내 설교까지 필요하겠나 싶어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 건강 관리를 위해 특별히 하는 운동은 있는지요? “디스크 골프를 좋아합니다. 재미도 있고 운동도 되고 돈도 안 들죠. 장로님들과 회의도 어떤 때는 디스크 골프를 즐길 수 있는 공원에서 합니다. 야외에서 운동하면서 계속 대화도 할 수 있으니 코로나 시대엔 딱이죠. 대표님도 꼭 해보세요. 하하.” 디스크 골프(disc golf)는 골프공 대신 플라잉 디스크를 골 홀(디스캐처)에 넣는 게임으로 게임 방식도 골프와 거의 비슷하다. - 이민 목회자로서 포부가 있다면 “미국에 오래 살다 보니 이젠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브리지(bridge)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점도 있더라고요. 다음 세대 목회자를 잘 양육해서 제대로 역할 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게 제 일인 거 같습니다.” 김 목사는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것을 목회의 목적으로 세웠다. “제 소원은 빨리 그만두는 거예요. 후배 목사 잘 성장하게 돕고 교인들 잘 돌보다가 비전 있는 다음 타자에게 잘 넘겨야죠.” - 끝으로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한 마디 해주신다면? “사람 마음은 성심(聖心)과 허영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심은 성스러운 마음이니까 그렇다 치고 허영심도 나쁜 게 아닙니다. 순교, 헌신, 섬김도 어떻게 보면 모두 허영심에서 나오는 것이죠.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영심을 준 이유는 내 현실만 바라보며 내 것만 챙기지 말고, 가족도 돌보고 이웃도 돌보면서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꿈을 꾸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웃을 위해, 커뮤니티를 위해 적극 섬기고 봉사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한인사회에도 그렇게 이름 알려지는 분들이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아틀란타한인교회 연혁 -1971년 1월 에모리 캔들러 신학교에서 창립 예배 개최 -1988년 6월. 미연합감리교회(UMC) 가입 -1989년 6월 던우디 예배당 입당예배 - 1990년 5월 애틀랜타제일감리교회와 통합 - 1999년 9월 한글학교 시작(냇가에 심은 나무(TPS) 전신) - 2004년 3월 둘루스 예배당(다목적센터) 입당예배 - 2004년 9월 샬롬대학(노인대학) 시작 - 2006년 4월 뉴난한인교회 개척 - 2011년 3월 새예배당 및 교육센터 입당예배 - 2013년 11월 한인회관 건립기금 모금 - 2015년 6월 김세환 담임목사 부임 정리= 배은나 기자

2021-01-29

[이종호 대표가 만난 사람] <1> 몽고메리한인회 조창원 회장

몽고메리(Montgomery)는 앨라배마 주도다. 미국 인권 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중심지로도 유명하다. 1960년대 버스 보이코트 운동과 몽고메리-셀마 행진의 주인공 로사 파크 여사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활동 근거지도 이곳이었다. 1990년대 이전 사양길의 섬유산업과 목축업에 의존하던 시골 도시였던 몽고메리는 21세기 들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2005년 연 30만대 생산능력을 갖춘 현대자동차 생산공장(HMMA)의 입주가 가져온 상전벽해의 변화였다. 현대차 공장이 채용한 직원만 3000여명에 이르렀다. 현대모비스 등 동반 진출한 협력사 직원까지 더하면 1만명 이상의 신규 고용이 이뤄졌다. 현대차는 물론 하청, 재하청 업체들이 주변에 속속 들어서면서 한인 유입도 크게 늘었다. 지역 부동산 관계자들에 따르면 몽고메리 한인 인구는 많게 잡아 1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물론 센서스 집계는 이보다 훨씬 적다. 한국이나 타지에서 비즈니스로 드나드는 유동 한인이 많고, 주재원이나 유학 등으로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도 적지 않아서다. 하지만 20~30분 거리의 어번(Auburn)이나 오펠라이카(Opelika), 기아차 공장이 있는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등의 한인까지 합치면 앨라배마 동남부 한인 숫자는 1만 명이 훌쩍 넘을 것이라는 게 지역 주민들의 공통된 얘기다. 2021년 새해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1월 11일.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조창원 몽고메리한인회장을 만났다. 10여 분 먼저 약속 장소인 한인회관 앞에 도착했다. 넓은 몰 여기저기 다른 한글 간판들을 살피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비도 오고 하니 식당에서 바로 보자는 전화다. 앨라배마 한인 식당의 음식 맛은 어떨까 궁금하던 차에 잘 됐다 싶었다. 한인회관 가까운 순두부집에서 첫 대면을 하며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눴다. 편안한 일상복 차림이 여유로워 보였다. 마스크를 벗고 마주한 첫 인상이 잘 아는 형님처럼 친근했다. 똑같이 들깨순두부를 주문했다. 이심전심, 마음이 통했나보다. 몽고메리 동네 이야기에서 시작해 이민 생활, 사업, 미국 사회 등을 거쳐 가족 이야기까지 화제가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한인회 이야기도 나왔다. - 표정이 편안해 보입니다. 10년은 젊어 보이는데요.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뭐든지 제가 좋아 선택한 결정이면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지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인회 일도 마찬가지고요. 젊게 사는 비결이라면 그게죠 뭐.” 조 회장은 1956년생이다. 올해 만 65세가 된다. 2001년 미국에 왔으니 이민 생활은 21년째다. 텍사스 휴스턴으로 처음 이민 왔고 2003년에 앨라배마 몽고메리로 이주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다른 이민자들처럼 처음엔 캐시어, 뷰티서플라이 등 여러 일을 전전했다. 지금은 J&C엔터프라이즈라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자동차 관련 협력회사 중의 하나로 직원은 100여 명에 이른다고 했다. - 한인회관이 꽤 멋지네요. 공간도 넓고요. “20대 한인회장을 하셨던 고 심수용 회장님 덕분입니다. 이곳 몰 소유주였던 그분이 2010~2011년 한인회장을 하시면서 20년간 무상으로 쓸 수 있도록 공간을 내 주셨거든요. 덕분에 도서관, 회의실, 강좌 공간등으로 잘 활용해 왔습니다.” - 취임하기까지 곡절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그 때문에 언론에도 많이 오르내렸죠. 나름 모범적인 한인회라 자부했던 몽고메리한인회가 소송 사태로까지 갔으니 본의 아니게 좋지 못한 이미지를 보여준 것이죠.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필귀정이라는 말 그대로 모든 게 잘 해결되어 감사한 일이지요. 저로서는 억울한 면도 많고 할 말도 많지만 이젠 다 지난 일이고 이젠 과거 얘기보다는 미래만 생각하며 나아가려 합니다.” 조 회장 이야기대로 2019년 25대 몽고메리한인회장 선거는 전국 한인들의 관심사였다. 당시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조창원 회장은 출마자 3명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었지만, 24대 한인회 집행부와 선거관리위원회가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고 당선 무효를 주장하면서 파문이 시작됐다. 이에 조 당선자는 법원에 집행부를 상대로 선거 간섭 중단 명령을 신청했고, 한인회 측도 반대 소송을 내면서 사태는 더 복잡해졌지만 법원이 최종적으로 피고의 반대 소송을 기각하면서 소송은 일단락이 됐다. 조 회장은 2020년 1월 어번대학교 몽고메리캠퍼스(AUM) 강당에서 취임식을 갖고 25대 몽고메리한인회장으로서의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한인회장에 취임하셨는데, 막상 되고 보니 어떻던가요? “이것저것 계획을 많이 세웠습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코로나 사태가 터져 많은 거의 중단되거나 취소되고 말았죠. 올해는 제발 상황이 호전되어 더 많이 뛸 수 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그러나 대답과 달리 조 회장은 코로나 사태 초기 고가의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힘들어 하는 한인들을 위해 사재 1만 달러를 들여 마스크를 구입해 나눠주는 등 한인 사회 돕는 일을 쉬지 않았다. - 올해 특별히 계획하고 있는 일은 뭔가요? “문 닫은 몽고메리 한국학교를 다시 부활시키고 싶습니다. 물론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교사 구하기도 힘들고 전처럼 지원금을 확보하는 것도 쉽지 않거든요. 그래도 1.5세, 2세들을 위한 정체성 교육이란 점에서 한국학교는 꼭 필요합니다. 한인회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 임기 중에 안 된다면 초석이라도 다져 놓을 생각입니다.” - 또 다른 계획은? “가을 쯤 코리안 페스티벌 개최도 생각 중입니다. 한인들에게 즐겁고 보람된 시간을 제공하고 주류 사회에 한인커뮤니티도 알리자는 게 취지지요. 꼼꼼히 잘만 준비한다면 한인들의 자부심도 높이고 우리를 바라보는 주류사회의 시각도 더 좋아질 겁니다.” - 준비할 게 많을 텐데 구체적인 진척은 있나요? “작년 취임 직후 한인회 임원들과 함께 스티븐 리드 몽고메리 시장을 방문했었습니다. 그 때 시내 초등학교 한 곳을 한국학교 장소로 빌려주는 문제 등에 대해 협조 약속을 받았습니다. 지난 연말엔 김영준 애틀랜타 총영사, 최병일 동남부한인회연합회장 등과 함께 몽고메리 시청을 방문, 다시 리드 시장을 만났습니다. 그때도 한인사회 활동에 적극 협조하겠겠다는 긍정의 대답을 듣고 왔습니다. 문제는 코로나 상황인데 어서 빨리 해결되길 기도해야죠.” 몽고메리한인회와 동남부연합회, 애틀랜타 총영사관 등 3개 기관은 12월 방문 때 공동으로 마련한 마스크 6200장, 손 소독제 480개와 성금 2000달러를 몽고메리시장에게 전달했다. - 끝으로 한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몽고메리한인회는 1979년 창립됐으니 올해로 42년째입니다. 그 동안 우리 한인회는 미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모범적인 한인회였습니다. 일부 문제가 있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전임 회장님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한 덕분이었지요. 저도 좋은 점은 본받고 부족했던 점은 보완해 몽고메리한인회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회복하고 물려주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인 여러분들도 한인회가 준비하는 행사가 차질 없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많은 격려와 응원 부탁드립니다.” 흔히 한인회는 한인사회의 구심점이 돼야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혼자서 되는 일은 없다. 회장을 비롯한 집행부의 헌신과 봉사가 앞서야 하고, 묵묵히 성원하는 한인들도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의 관심이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다. 남다른 곡절 끝에 한인회장이 된 만큼 몽고메리한인회 조창원 회장. 그동안은 코로나 사태로 마음껏 뜻을 펼치지 못한 만큼 2021년 새해엔 꿈꿨던 모든 일을 잘 감당해 내기를 기대해 본다. ▲몽고메리한인회 - 웹사이트 : mgmkorean.korean.net - 주소 : 1737 Eastern Blvd, Montgomery, AL 36117 - 전화 : (334)356 -1720 글·사진=이종호 애틀랜타중앙일보 대표

2021-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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